선사들은 인간의 번뇌가 일어나는 바로 그 현장을 직격하여 눈뜨도록 설법한다. 따뜻한 차가 있으면 차를 권하고, 시원한 물이 있으면 물을 따라준다. 주장자가 있으면 주장자를 휘두르고, 깨가 있으면 깨의 무게를 보여준다. 그것은 분별적 사유를 거치지 않으므로 결코 잊을 수 없는 직접적 진리체험을 선사한다. 여기 선사들의 직격타를 바로 보여주는 3가지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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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회 설법 모습. 국제신문DB |
첫 번째 이야기. 당나라 때 안사의 난을 평정하고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곽자의(郭子儀)라는 충신이 있었다. 그는 황제를 능가하는 능력과 권위를 갖추고 있었음에도 한결같은 충성심으로 군주에 헌신했다. 특히 그는 국가를 패망에서 구한 공로로 재상에 올라서도 남다른 겸손함으로 처신하여 만인의 존경을 샀다. 한번은 못된 환관이 그 부친의 묘소를 파헤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당시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그는 복수 대신 자기반성의 태도를 보여준다. 전쟁 중에 부하들이 적지의 무덤을 노략질하는 일이 있었는데 지휘관으로서 이것을 통제하지 못한 벌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 일로 그는 대신들은 물론 못된 환관까지 감복시켜 조정을 끝없는 갈등의 늪에서 구해낼 수 있었다. 그런 곽자의가 선사에게 질문했다. “불교에서 말하는 오만함이란 무엇입니까?” 자기의 겸손함에 대한 자부심에서 나온 질문이었다. 선사가 그를 깔보는 표정으로 고함을 쳤다. “이 멍청이가 뭐래?” 순식간에 법당이 얼어붙었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재상이 아닌가? 겸손이 체질화된 곽자의의 얼굴에도 분노의 표정이 나타났다. 그러자 선사가 말한다. “재상님! 그게 바로 오만함입니다.” 곽자의는 자신의 겸손이라는 것이 오만함의 위장이었음을 알았다. 그리하여 그것을 내려놓고 자기완성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
두 번째 이야기. 한 사무라이가 선사에게 지옥과 천당을 볼 수 있는지 물었다. 선사가 묻는다. “그대는 뭐 하는 사람인가?” “사무라이입니다.” “그대 같은 사람을 호위로 쓰는 멍청한 주인도 있는 모양이네. 내가 보니 거지부랑배인데.” 화가 난 사무라이가 칼을 뽑았다. 선사가 말한다. “지옥의 문이 열렸네.” 사무라이가 이성을 되찾아 칼을 도로 넣자 선사가 말한다. “천당의 문이 열렸네.” 사무라이는 이 일로 천당 지옥을 직접 체험한다. 이후 그의 칼은 사람을 살리는 칼로 되살아난다.
세 번째 이야기. 인색한 부인 때문에 사회적 처신이 어려워진 한 신도가 선사에게 도움을 청했다. 선사가 그 부인을 찾아가 다짜고짜 손을 내밀었다. 부인이 물었다. “어쩌라고요?” 선사가 말한다. “이렇게 내밀기만 하고 내릴 수 없다면 이 손은 어떤 손이겠습니까?” “기형이지요.” 선사가 주먹을 쥐며 물었다. “이렇게 쥐기만 하고 펼 수 없다면 이 손은 어떤 손이겠습니까?” “기형이지요.” “손에 들어온 것을 잡기만 하고 내놓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식공유의 시대다. 아는 것이 힘이라 하던 시대가 있었지만 이제 직접 체험하고 실천하는 것이 힘인 시대가 되었다. 불교의 설법이 딱 그렇다. 수천 년의 세월 동안 불교는 머리로 아는 길이 아니라 직접 체험하도록 이끄는 길을 가리켜왔다. 직접 체험하여 전 존재가 변하는 일, 그것이 불교의 길이다.
동의대 교양대학 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