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냥’ 대학서 문학을 전공하고
- ‘살고 싶어’ 중국·일본서 지내며
- 여러 풍경과 사람들을 마주했다

- 생사의 순간에 떠오른 ‘소설’
- 유일하게 소모가 아니란 생각에
- 결국 작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 현실과 상상이 공존하는 작품엔
- 우리의 인생이 겹겹이 담겨 있다

소설 내용이 지금 바로 옆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여겨진다. 미래의 시간을 배경으로 쓴 소설은 현재를 이야기하는 것 같다. 강성민 소설가의 소설집 ‘길가메시 프로젝트’를 읽으면 그런 생각이 든다. 이야기와 현실, 미래와 현재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소설가는 비명 없이 담담하게 쓰는데 등장인물의 감정이 아프게 와 닿는다. 소설의 자간과 행간 뒤에 무엇이 있을까 궁금하고, 거기에 있는 소설가에게 말을 건네고 싶어진다.

	경남 양산 황산공원에서 만난 소설가 강성민. 아침마다 공원을 산책하면서 작품을 구상한다고 했다.

현재 경남 양산시에 살고 있는 강성민을 황산공원에서 만났다. 물금역 뒤, 낙동강을 따라 펼쳐진 황산공원은 낙동강 변 최대 수변공원이다. 겨울 공원은 추웠다. 그래도 단단히 옷을 챙겨 입고 산책을 하거나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이 공원을 본 뒤에 양산으로 이사를 왔어요. 아침마다 공원을 한 바퀴 돌아요. 7㎞쯤 걷는데, 이곳에서 작품 구상도 하고 운동도 하는 소중한 장소입니다.” 물억새가 겨울 오후 햇살에 반짝였다. 포장되지 않는 산책로도 있는데, 그 길을 걷고 있자니 강변 시골길을 걷는 정취가 느껴졌다.

겨울이라 조금 황량하기도 했지만, 땅속에 그리고 강물 속에는 살아 움직이는 생명의 기운이 있을 것이다. 강성민은 매일 아침 이 길을 걷고 있다.

■천천히 돌고 돌아 소설과 만나다

	길가메시 프로젝트- 강성민·2017·전망

강성민은 1975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2013년에 국제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낮달’이 당선됐다. 그가 소설과 만나기 위해 걸어온 길은 ‘돌고 돌아’ 혹은 ‘천천히’였다. “부산예술대학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할 때, 딱히 문학을 하겠다고 결심을 한 게 아니라 ‘그냥’ 갔어요. 그때 강의 들으면서 읽었던 소설들이 지금도 기억납니다. 작품 품평회 때 제 작품이 혹독하게 비평을 받았죠. 그때 오기가 조금 나기는 했지만, 소설가가 되고 싶다는 각오는 없었어요.” 졸업을 한 뒤에 동의대학교 국문학과에 편입을 했다.

그런데 관심은 중국으로 향했다. 중국어만 공부하고 돌아오자는 생각에 휴학하고 중국으로 갔다. 2년을 살다 돌아와 졸업하고, 다시 일본으로 떠났다. “중국이나 일본에 다녀온 친구들의 경험을 들으면서 가보고 싶었어요. 제겐 여행이 아니라, ‘그곳에서 사는 것’이었죠. 일본에서도 2년을 살았어요.” 어학원 다니고, 아르바이트하고 빠듯하게 살던 그때 동일본 대지진을 겪었다. “지진 때문에 모든 게 멈춘 것 같았습니다. 시간도, 생명도 다 멈추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때 소설이 생각났습니다. 스티븐 킹의 창작론 ‘유혹하는 글쓰기’에서 읽었던 대목이 떠올랐어요. 1999년 스티븐 킹은 생명을 잃을 뻔한 큰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진실을 깨달았대요. 바로 자신이 글쓰기를 원한다는 것이었답니다. 그 대목을 떠올리면서 제가 20대에 죽을 뻔했던 일도 기억나더군요. 죽음을 생각하면서 어떻게 살 것인가도 고민했어요. 즐겁게 살고 싶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다는 결론을 내렸죠.”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한 편의 소설을 썼다. 그리고 국제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됐다. “남들은 첫 신춘 응모에서 당선된 걸 부러워했지만, 저는 큰일 났다 싶은 게 덜컥 겁이 나더라고요. 소설을 멀리한 건 아니고 꾸준히 읽긴 했지만, 소설을 쓸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은 나 자신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죠.” 소설이 뭔지 잘 모르겠다, 글을 쓰는 것이 생활의 방편이 될 수 있을까 하는 고민도 많았다. “그동안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면서 많은 경험을 했는데, 어떤 일을 하든 지루하고 내가 소모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늘 들었습니다. 유일하게 내가 혼자서 구상하고 만들어낼 수 있는 것, 그것이 나의 소설이었습니다.” 그렇게 돌고 돌아서 강성민은 소설과 만났다. 소설도, 강성민도 서로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던 것이다. 어떤 소설가가 그런 강성민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소설 안 한다고 도망치더니 결국 하게 됐네”라고.

■온전히 혼자서 즐겁게 할 수 있는 일, 소설 쓰기

‘길가메시 프로젝트’는 강성민이 등단 5년 만에 낸 첫 소설집이다. 개성공단 폐쇄 결정을 배경으로 남북한 노동자들의 모습을 그린 ‘기적의 시간’, 서울의 빌딩 밀집 지역에서 배달원들이 겪는 비인간적인 생활을 다룬 ‘역삼동의 전설’, 클론을 배양해 신선한 혈액을 공급받고 인간 수명을 정확히 예측하는 미래 사회를 보여주는 ‘길가메시 프로젝트’, 노동 현장에서 빚어지는 정규직·비정규직 노동자들 간의 갈등을 풀어낸 ‘정규’, 큰 빚을 지게 된 아빠가 비극적 선택을 하는 과정을 딸의 시선으로 풀어낸 ‘홀로 아리랑’, 삶의 무게에 눌려 출산을 포기하고 소통조차 힘든 부부들의 삶을 그려낸 ‘낮달’. 6편의 작품이 수록됐다.

이 작품들을 읽고 있으면, 강성민이 소설로 오기까지 사람들이 이 시대를 어떻게 겪어내고 있는지 보느라고 늦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짐작이나 상상이 아닌, 몸으로 직접 겪어낸 체험이 소설의 옷을 입고 있다. 그래서 강성민의 소설을 읽는 동안 객관적 독자의 태도는 금세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SF소설 같은 느낌이 나는 ‘길가메시 프로젝트’도 마찬가지다. 의학의 눈부신 발전으로 질병과 노화를 관장할 수 있는 시대가 배경이다. 그래서 오히려 죽음은 가볍게 여겨지는 시대이다. 죽음을 앞둔 주인공 안 박사의 심경을 다룬 대목이 묵직하게 다가온다. “사망일 3년 전부터 받는 의무 심리 치료도 시시각각 죽음의 공포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생명 공학의 발달로 인류는 지상에 발을 내딛는 날 죽을 날을 알게 되었다. 살면서 비명횡사만 일어나지 않는다면 산부인과에서 선고한 그 날, 사망한다. 첨단 의료 기술로 통증 없이 죽음을 맞는 시대였지만 영면실에 누워 목숨이 스위치 꺼지듯 차단되는 모습도 안 박사는 꺼림칙했다.” 아직 오지 않는 시간대를 당겨와 그 안에서 삶의 본질을 찾고, 생명의 지속을 꿈꾸는 인간군상을 펼쳐 보이는 작품이다. 멀지 않아 인간은 정말 이런 시대를 살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즐겁게,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고 싶다”는 강성민의 말을 한 번 더 떠올려본다.

온전히 혼자서 즐겁게 할 수 있는 일, 소설가는 강성민에게 잘 어울리는 직업이다.

책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