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부산메디클럽

조봉권의 문화현장 <45> 시로 여는 2019, 시여 말을 걸어다오

시가 곤경에 빠졌다 해도, 시의 속삭임에 귀 기울인다

  • 문화전문기자 bgjoe@kookje.co.kr
  •  |   입력 : 2019-01-08 19:21:18
  •  |   본지 20면
  • 글자 크기 
  • 글씨 크게
  • 글씨 작게
2019년을 ‘시’로 맞이해보고자 최근 두어 달 사이 나온 지역 시단의 시집을 들여다봤다. 시인들은 여전히 성실히, 열심히, 시로 세상과 내면과 삶을 읊거나 그리거나 노래하거나 해체하고 있었다. 마음의 현을 울리는 좋은 시로 다가왔으나, 왠지 ‘일기’를 쓴 것처럼 시인 내면에 머문 듯한 시편들이 있었다. 이런 작품은 이 칼럼의 기획의도 바깥에 있다고 보아 일단 뒤로 돌렸다.
   
그랬더니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산문’ 한 편이었다. 강남주 시인이 시집 ‘흔적 남기기’(시문학사)에 실은 ‘에필로그’이다. 강 시인은 지금 시가 처한 곤경을 ‘거대한 느낌’으로 드러낸다. 1939년생인 그는 1960년 4·19 혁명 때 국제신문(당시 국제신보) 최계락 부장의 의뢰로 4·19 추도시 ‘19세 소년의 죽음’을 발표했다. 1973년 첫 시집을 냈으며, 1974~1975년 ‘시문학’에서 추천 완료됐다. 등단 44년, 시력(詩歷)으로 치면 60년에 이르는 세월을 보내고 시인으로 살아남은 백전노장은 토로한다.

“시에서의 왕정복고는 이제 없을 것이다. 인공지능이 그 자리를 차지해버렸기 때문이다. 막이 내리고, 종말을 해석하기 위해 주석을 요구하는 관객은 아무도 없다. 목가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오직 나만 우두커니 서서 돌아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이제 왕도 없다. 왕을 따르는 신하도 없다. 실지 회복을 꿈꾸던 천하대장군은 이미 전사하고 나 혼자뿐이다. 살기 위해서는 고군분투뿐이다. 재래식 전법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하략)”

이어 그는 시 ‘흔적 남기기’를 통해 고백한다.

“한 마리 짐승이었다 / 나는 / 나무 등걸에 몸 부비며 / 비늘을 짓이기고 털을 붙이고 / 잡아먹을까 잡혀 먹힐까 / 살기를 다툼하면서 / 나만 챙겼다 / 산야를 달리고 또 달려 / 영역을 넓히겠다고 오줌 누고 / 이빨 내밀며 안간힘 했다 / 결국 흔적도 없어질 목숨인 것을 / 뭔가 남기려고 기를 썼지만 / 끝내 한 마리 짐승이었다 / 나는.”(전문)

장르로서 오늘의 시를 10, 20년 전과 견주면 격세지감이 든다. 아름다운 시는 여전히 많지만, 시는 이전보다 훨씬 더 ‘개인적인 것’ 또는 ‘시인끼리만 나누는 것’이 돼가고 있다. 함께 나눌 공(公)적 측면의 면적이 줄어든 느낌이다. 강 시인은 “시에서의 왕정복고는 이제 없을 것”이라고 했다.

이런 곤경에 맞닥뜨렸다는 것은 전환이나 도약의 기회가 왔다는 뜻도 된다. 시 ‘흔적 남기기’는 80세 강 시인이 삶과 문학을 통으로 되새기며 “끝내 한 마리 짐승이었다”고, 내면을 게워 올리듯 고백하며 진실의 느낌을 전한다. 이것이 그의 ‘방법’인 듯하다. 이 시는 가슴속 현을 울렸다.

안효희 시인이 새로 낸 시집은 ‘너를 사랑하는 힘’(푸른사상)이다. 여기 실린 ‘흐린 날의 건널목’이 말을 걸어온다.

“사람들은 이미 / 불빛 너머 저쪽으로 다 건너갔다 / 24시 편의점에서 나왔을 때 / 비에 젖은 라일락꽃 떨어지기 시작하는데 / 뛰어가면 건널 것인가 / 마지막 몇 개의 파란 불빛을 넘어 / 서두르면 닿을 것인가 / 나의 동쪽, / 수많은 발자국 소리를 가진 저 불빛 속으로 / 봄이 가고 여름이 오는데 / 불빛은 방향도 없이 사라져가고 / 머리카락은 혼신의 힘으로 날아가는데 / 저기 걸어가는 사람, 걸어오는 사람 / 또 한 계절이 모퉁이를 돌아서 가는데 / 흐린 날의 건널목 / 건너지 못하는 강을 쳐다보는 말(馬)처럼 / 순간 속에서 바라보는 / 건너편 저 넓은 세상.”(전문)

‘흐린 날의 건널목’이라는 곤경, ‘건너지 못하는 강을 쳐다보는 말(馬)’과 같은 나의 내면, ‘건너편 저 넓은 세상’이라는 아련하고 애타는 구절이 마음 곁으로 시를 바짝 당겨준다. 새해의 마음을 거듭 돌아보게 한다.

시조의 백전노장 이우걸 시조시인(1973년 ‘현대시학’ 등단)은 시조집 ‘모자’(시인동네)를 냈다. 인생과 문학에서 쓴맛 단맛 다 본 시조시인의 정형시 가운데 단시조의 맛에 주목했다. 노장이 쓴 짧은 시조는 울림이 좋다. 예컨대 ‘단풍잎’. “단풍잎은 자기가 늘 꽃인 줄 알았지요 / 그래서 찬바람에 쓸려가던 그 저녁까지 / 한 번도 스스로의 생을 / 돌아보지 못했습니다.” 끝. 예컨대 ‘장사익’. “어둠을 퍼내기 위해 태어나는 악기도 있다 / 그 악기의 일생이란 늘 울음의 나날이지만 / 우리는 그 울음 때문에 / 밝아지는 / 세상을 본다.” 끝. ‘구구절절’은 없다. 울림을 느끼는 건 독자 몫이다. 그렇게 긴 여운을 주고 독자가 생각하게 한다.

뒤이어 강달수 시인의 새 시집 ‘달항아리의 푸른 눈동자’(지혜)에 실린 ‘쌍봉낙타’가 곤경을 업은 채 새해를 맞는 우리를 위해 어슬렁 나선다.

   
“(전략)그렇지만 나는 사막도 죽음도 운명이라 생각한다 / 결코 두려워하지 않고 두 개의 혹으로 / 기꺼이 홀로 사막을 밤새 걸어간다 / 모두 다 깊은 잠에 빠진 밤이 오면, / 차디찬 사막에 내리는 별빛을 밟으며, / 잘근 잘근 긴 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 쓰디쓴 관절의 고통을 곱씹으며, / 황량한 바람 부는 우리 속에서 / 못난 에미를 기다릴 어린 눈망울을 생각하며 / 아프고 지친 발걸음을 재촉한다.” 새해 벽두, 시가 걸어오는 말을 듣는다.

문화전문기자 bgjoe@kookje.co.kr
ⓒ국제신문(www.kookj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국제신문 뉴스레터
국제신문 네이버 뉴스스탠드 구독하기
국제신문 네이버 구독하기
뭐라노 뉴스

 많이 본 뉴스RSS

  1. 1부산에 하나 뿐인데…‘부산예대’ 내년 2월 문 닫는다
  2. 2해운대 벗어나 우리동네로…부산이 온통 극장이네요
  3. 3“능인선원 매각 협상 나서라” 국제신문 사활 건 총력투쟁
  4. 4준비 덜 된 경찰시대…‘대국민 수사 실험’ 우려
  5. 5‘반쪽’ 자갈치 축제…내홍에 창립멤버 어패류조합 빠졌다
  6. 6[정쾌호의 부동산 탐구생활] 부산 아파트 10년, 이중 양극화와 위상 추락
  7. 7전재수 ‘되돌릴 수 없는 해양수도 기반 조성’ 선언
  8. 8부산중수청 문 여는데 아직 공사중…외부 출입통제도 어려워
  9. 9“가덕 공사비 증액 법 개정 앞서 정부 약속부터”(종합)
  10. 10아침기온 경남 7도, 부산 15도…2일부터 쌀쌀해진다
  1. 1‘교정시설 조성 지원 특별법’ 발의…부산구치소·교도소 통합 뒷받침
  2. 2부산 국힘 “보좌진 유죄 선고…전재수 시장, 시민에 사과해야”
  3. 3[속보]우크라 외무 “한국 중요해…외교적 오해 해결바라”
  4. 4[속보] “전두환 내란 아냐” 김태규 ‘제명 촉구 결의안’의결
  5. 5국힘, 중수청 앞서 “범죄자 천국될 것” 여론전(종합)
  6. 6李 “김지용, 친윤 아닌 반윤 검사” 중수청장 청문 요청키로
  7. 7靑 “이 대통령 ‘불의의 사고’ 표현, 부상 장병 위로한 것…북한 면죄부 주려는 것 아냐”
  8. 8이 대통령, 김지용 중수청장 후보자 청문요청안 재가
  9. 9정동영 “DMZ 지뢰 사고, 불행한 일…평화공존 더 절실해져”
  10. 10李대통령 “우크라, 상대국 원수 거짓말쟁이 만들어…사과 거부시 추가 조치”
  1. 1“가덕 공사비 증액 법 개정 앞서 정부 약속부터”(종합)
  2. 2동래 플래그십 문 연 ‘르노’…미래차 R&D센터 내년 오픈
  3. 3북극 누빈 아라온호, 항로예측 기틀 마련
  4. 4신한은행 해킹 서버서 “‘중국어 AI 침투도구’ 흔적 발견”
  5. 5신한銀 2만5000명 고객정보 털렸다…당국 조사
  6. 6대선주조 부산 문화 앞장…‘부산국제록페스티벌’ 8년째 후원 행보
  7. 7리사이클링·항만운영·담수화…부산 미래산업 이끌 혁신기술
  8. 8BPA, 5번째 해외 물류거점 구축…베트남 사업 본궤도
  9. 9부산 연구개발 우수성과- 우수학술 부문
  10. 10주가지수- 2026년 10월 1일
  1. 1부산에 하나 뿐인데…‘부산예대’ 내년 2월 문 닫는다
  2. 2“능인선원 매각 협상 나서라” 국제신문 사활 건 총력투쟁
  3. 3준비 덜 된 경찰시대…‘대국민 수사 실험’ 우려
  4. 4‘반쪽’ 자갈치 축제…내홍에 창립멤버 어패류조합 빠졌다
  5. 5전재수 ‘되돌릴 수 없는 해양수도 기반 조성’ 선언
  6. 6부산중수청 문 여는데 아직 공사중…외부 출입통제도 어려워
  7. 7아침기온 경남 7도, 부산 15도…2일부터 쌀쌀해진다
  8. 8“기관장 인선, 유능하면 지역 불문…산은 유치 채널 총동원”
  9. 9법리 복잡한 지능범죄 급증…“공부해 수사할 엄두 안 난다”
  10. 10시민이 만든 '부캉이' 공공 자산으로…부산시, 상표권 독점 막는다
  1. 1송교창·최준용 빠진 KCC…‘루이스 킹’ 희망될까
  2. 2KLPGA 대회 처음 부산서 여는 HJ重… “지역과 상생할 것”
  3. 3메치고 쏘고…한국 유도·양궁 ‘금빛 데이’
  4. 4한국 여자 양궁 단체전 인도에 져 은메달…8연패 무산
  5. 5LoL 대표팀, 대만 꺾고 아시안게임 금메달…무실 세트 제패
  6. 6성적 부진·단장 공백·감독 결별·구단주 경고…김해FC ‘사중고’
  7. 7돌아온 금빛 주역들, 프로야구 막판 순위·타이틀 경쟁
  8. 8HJ중공업, 8∼11일 KLPGA 챔피언십 대회 주최…부산서 처음 열려
  9. 9해볼 만하다…女축구, 8년 만의 AG 메달 도전
  10. 10중원 황인범·투톱 변화…승리 축포 쏠까
우리은행
미리보는 제31회 BIFF
해운대 벗어나 우리동네로…부산이 온통 극장이네요
미리보는 제31회 BIFF
日 70년史부터 ‘올나잇’ 상영회까지…애니 세계로 초대
궁리와 시도 [전체보기]
노동 운동부터 계엄까지…예술로 사회문제 비추다
비바람 견뎌낸 그의 회화…마침내 ‘고정관념 감옥’서 해방
김민우의 인서트 [전체보기]
사랑이 불가능한 시대의 가능한 사랑
환상이 불러일으킨 파국
문화레시피 [전체보기]
‘부산 발레’ 낙동강 타고 새 물길 열다
붉은 빛 조명, 배우·합창단의 호연…눈앞에 다가온 부산오페라하우스
박현주의 신간돋보기 [전체보기]
약학박사 연륜이 깃든 시조집 外
익숙한 물건에 깃든 삶의 온기 外
박현주의 책 이야기 [전체보기]
노력과 성공은 비례하는가…현대사회 씁쓸한 이면
히말라야 빙하 붕괴로 대참사…더 심각해진 기후 재난
아침의 갤러리 [전체보기]
박자현-꾸지 않는 꿈
장승택-ayered Painting P60-11
이 한편의 시조 [전체보기]
기다림의 미학 /윤종순
빨래 /심여혜
주말 영화 박스오피스 [전체보기]
추석 연휴 ‘암살자(들)’ 정상…2위 ‘타짜: 벨제붑의 노래’
‘인턴’, ‘오디세이’ 제치고 정상…허진호 감독 ‘암살자(들)’ 예매율 1위
오늘의 운세- [전체보기]
오늘의 운세- 2026년 10월 1일 (음 8월 21일)
오늘의 운세- 2026년 9월 30일 (음 8월 20일)
조해훈의 고전 속 이 문장 [전체보기]
할아버지·아버지·본인·아들까지 정쟁으로 죽은 김제겸의 글
아침 산안개를 읊은 조선 전기의 문신 월헌 정수강
  • 맘편한 부산
  • 부산국제마라톤
  • BNK생명나눔챌린지
  • 유콘서트
걷고 싶은 부산 그린워킹 홈페이지
국제신문 대관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