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학시절 동아리 활동으로 시작
- 동해안별신굿 보유자 김석출 등
- 전국 명인 찾아다니며 실력 쌓고
- 부산 만의 전통 멋과 소리 전파
- “관객과 교감 이룰 때 성장 느껴
- 상설 공연장 만들어지길 기대”
새해다. 해맞이 명소를 찾아 7번 국도를 달려본다. 때로는 고요하고, 때로는 거칠게 포효하는 동해. 솔직하고 개방적인 부산의 기질은 날것 그대로의 동해와 닮았다. 지난달 국립부산국악원에서 열린 풍류전통예술원의 공연은 ‘자브랑-깽’으로 시작했다. 암전 속에 한 줄기 탑 조명이 켜지고, 박종환이 꽹과리를 ‘치기’ 시작한다. 그의 손은 이내 악기를 ‘주무르고’ 악기와 그의 손은 한 몸처럼 ‘비벼진다’. 꽹과리 소리는 어느새 동해가 되어 무대를 넘어 객석까지 온통 넘실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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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농악 장구 보유자인 박종환 풍류전통예술원 대표가 연습실에서 인터뷰를 하기 전 설장구 시범을 보이고 있다. 김종진 기자 kjj1761@kookje.co.kr |
■풍물에 미친 경상도 남자
“재즈와 같아요. 기본적으로 정해진 틀만 지키고, 그 틀 안에서는 자유로운 음악을 합니다. 동해와 파도의 에너지를 담았다고 할까요. 자유롭고, 남성적이고, 사납기도 합니다.” 팸플릿에는 ‘자브라갱’이라 표기돼 있지만 박종환은 이를 ‘자브랑-깽’으로 고쳐 읽었다. 보통의 꽹과리 장단에 장식음을 화려하게 덧붙여 나가다가 한계에 이르면 장단을 뒤집는 고급 연주법을 말한다. ‘자브라’하는 부드러운 소리가 나도록 힘을 빼고 놓아주듯 쳐야 하고 지저분한 소리가 나서는 안 된다. 동해안 무악의 고도로 발달된 테크닉이 필요하지만, 그 타법을 그대로 재현해서는 할 수 없다. ‘자브랑-깽’에 대한 그의 자부심은 사뭇 대단했다.
어려서부터 풍물 소리가 들리면 심장이 두근거렸다. 대학 시절 동아리에서 풍물을 배우고 활동했는데 하면 할수록 풍물에 대한 갈증은 더욱더 커져갔다. 아르바이트로 번 돈과 등록금까지 몽땅 털어 전국의 명인들을 찾아다녔다. “이름난 분들을 찾아다니면서도 제가 좋아하는 어떤 스타일이 항상 심중에 있었어요. 아무리 잘한다고 해도 제가 추구하는 스타일과 맞지 않으면 의미가 없었습니다.” 전공(건축공학) 공부는 뒷전이었으니 풍물에 대한 열정이 얼마나 대단했었는지, 어떤 고난을 자처했었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여러 스승 중에 동해안별신굿 명예보유자 고 김석출 선생과 부산농악 예능보유자 고 김한순 선생의 영향이 가장 컸다. 대학 1학년 때 ‘부산민속예술축제’에서 김한순 선생의 연주를 보고 직접 찾아가 인연을 맺었다. 김석출 선생은 동해안별신굿이 세습무여서 집안사람 외에는 가르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90년 전후 가계 외의 제자를 기르기 시작할 때 장구와 꽹과리를 중심으로 동해안 무악의 타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기본만 3년이 걸렸지만, 스승의 공연은 테크닉과 음악 구성이 뛰어나 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마냥 좋았다. 스승의 유품과 기록을 가지고 있었는데 언젠가 연습실에 불이 나 모두 잃어버렸다. 당시에는 의연한 척했지만 사실은 스승을 두 번 잃은 듯한 상실감으로 꽤 오랫동안 고통스러웠다고 한다. 천상 경상도 남자다.
■“더 나은 경지에 오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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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 대표가 공연하는 모습. |
“선생님들이 한 30년은 해야 뭐 좀 알 거라고 하셨는데 그 말씀이 맞는 것 같아요. 30년이 넘으니 이제야 뭔가 좀 알 것 같습니다. 찌꺼기가 걷어지고 알짜만 남은 느낌이라 할까요. 전념할 수만 있다면 지금 이 단계를 넘어서 다음 경지에 오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는 부산시 무형문화재 제6호인 부산농악 장구 보유자다. 그런데도 “이제야 알 것 같고, 다음 경지에 다다르고 싶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풍물에 대한 그의 끝없는 열정을 생각하면서 다음 경지에 오르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물었다.
“저 스스로 한 단계 성장했다고 느끼게 되는 순간은 무대 위에서 관객과 충분한 교감이 이루어지는 그런 때입니다. 나의 기운이 관객에게 미치고, 관객의 기운이 나에게 다시 돌아오고, 그렇게 순환한 기운이 시너지를 일으키지요. 지금 이 단계를 넘어서려면 그런 순간이 많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좋은 공연을 많이 하고 싶습니다.” 그는 부산에 상설 풍물 공연장이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점잖게 공연을 ‘감상’하는 데 익숙한 사람이라면 그의 공연은 꽤나 충격일 것이다. 무대 위에 공연이 펼쳐지고 있는데 관객이 무대 위로 올라가 함께 춤을 추고, 객석에도 흥이 난 관객이 어깨를 들썩인다. 어느새 그가 선 곳은 ‘공연장’이 아니라 한바탕 축제의 장이 된다. 관객이 경험하는 해방감과 카타르시스는 연주자에게 전달되고, 연주자는 그 에너지를 통해 자신의 예술세계를 한 단계 승화시키는가 보다.
“풍물은 바람 ‘풍’자에 만물 ‘물’자를 씁니다. 만물에 기운과 생기를 불어넣고 평화를 가져다줍니다. 듣는 이의 신명을 불러일으키지요. 농악이라는 용어는 일제강점기 때 우리 음악을 격하시키기 위해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 전부터 썼어요. 농악 대신 풍물굿, 풍물놀이, 풍장, 굿 친다, 매구 등등 지역마다 다르게 부릅니다. 용어를 통일하려는 노력이 부족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민악(民樂)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어요. 저도 이 말이 가장 좋습니다.”
그가 장구를 맡고 있는 부산농악은 걸립을 특징으로 한다. 집집이 돌아다니며 풍물치고 축원하며 돈과 곡식을 얻는다. 일종의 프로단체다. 수입과 직결되다 보니 개인의 기예가 잘 발달됐다. 풍물에 담긴 철학 그리고 완성된 체계와 기술을 갖춘 연행예술로 부산농악에 대해 이야기하며 연신 “우리 조상들이 정말 좋은 것을 물려주셨다”는 감탄과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를 다룬 10년 전 기사를 읽으며 한 예술가의 삶을 생각한다. 10년 전의 그와 오늘의 그는 같은 사람이면서 다르다. 10년 후에도 이와 같을 것이다. 오늘도 여전히 꽹과리를, 장구를 잡는다. 우리 조상님이 물려주셨다는 ‘그 좋은 것’을 갈고 또 닦는다. 비단 박종환뿐이랴. 부산의 수많은 풍물재비들이 그러하리라. 우리는 묵묵히 업처럼 전통을 갈고닦는 그들을 어떻게 기억하고, 또 기록해야 할까. 가족의 희생과 뒷바라지에 대한 감사와 미안함을 끝내 말로는 표현하지 못하는, 어느 경상도 남자 예술가의 심중처럼 깊고 무겁다.
공연기획자·인제대 외래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