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연계서 경험 쌓은 무대연출가
- 과감하게 ‘시각적 극작법’ 도전
- 실험적 무대 메커니즘 구현 호평
- 이색 공연기법 시도한 것에 박수
춤은 공간을 활용한다. 특정 공간을 점유하는 미술과 달리 춤은 움직임의 변화를 반복하면서 공간에서 맥락을 만든다. 춤 공연에서 무대 세트와 조명, 움직임은 공간에 영향을 주는 중요한 시각적 요소다. 공간을 일차적으로 지각하는 것은 시각이다. 이때 시각은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까지 포함한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경계로 우리는 공간의 규모와 성격을 가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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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철호 씨가 시노그래피를 맡은 방영미 개인 춤판 ‘길에 이르는 길’ 중 한 장면. 지난해 7월 부산 민주공원에서 공연됐다. 사진가 박병민 제공 |
시노그래피(scenography)는 공연예술에서 텍스트를 시각적으로 재현하여 독자적인 의미를 구성하는 것을 말한다. 무대미술과 공통점이 있지만, 무대를 장식하는 미술을 넘어서는 일종의 ‘시각적 극작법’이다. 무대를 뜻하는 그리스어 ‘스케네(skene)’와 쓰기, 그리기를 뜻하는 ‘그라페노(grapho)’를 합성한 단어다. 주로 연극에 적용되며 연출가가 시노그래피를 겸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희곡과 대본이 바탕인 연극에서는 텍스트를 시각적으로 해석하는 시노그래피 작업을 선호하는 연출가가 있다. 로버트 윌슨과 우리나라에 작품을 선보인 아힘 프라이어는 시노그래피를 연출에 적극적으로 적용하는 대표적인 무대미술가 출신 연출가다. 1990년대 말 우리나라에 들어온 이 개념은 춤은 물론 연극에서도 아직 낯설고 모호한 개념이다.
필자의 기억으로는 시노그래피를 부산의 춤 공연에 접목한 사례가 몇 건 있었다. 모두 같은 사람의 작업이었다. 가장 최근은 지난해 7월 부산 중구 민주공원 소극장에서 열린 방영미 개인춤판 ‘길에 이르는 길’이다. 이 공연에 백철호(사진)는 ‘시노그래피’로 이름을 올렸다. 백철호는 부산에 전문 무대미술가가 없었던 1980년대 말에 공연계에 들어와 무대미술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연극, 뮤지컬, 오페라, 춤 등 거의 모든 공연예술 장르에서 수많은 작업을 하였고, 직접 제작한 몇 작품을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안무자가 출연을 겸해야 하는 개인 춤 공연에서 작품 전체를 객관적 시각으로 보는 역할이 없으면 안무자가 자기 생각에만 매몰돼 작품의 균형을 맞추기 힘들다. 이런 경우 작품 전반을 조정하는 역할을 연출이 맡는 것이 보통인데, 춤에서 시노그래피가 이 역할을 할 수 있다. 간혹 춤 언어에 익숙지 않은 외부 연출가가 작품에 개입해 춤의 특징이 흐려지는 경우가 있다. 춤은 작품의 기초가 되는 대본이 느슨하고 이미지의 비중이 커 텍스트를 시각적으로 해석하고 구성하는 시노그래피가 연출보다 더 알맞다.
‘길에 이르는 길’은 작품 구상 단계부터 시노그래피를 맡은 백철호가 결합해 방영미 안무자와 의견 교환을 통해 방향을 잡아나갔다. 안무자가 주제의 배경과 의미를 이야기하고 춤으로 어떻게 풀어나갈지를 설명하면 시노그래피가 그것을 이미지로 구체화했다. 몇 차례 안무자와 시노그래피가 절충 과정을 거친 결과 소품, 조명, 의상 그리고 음악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요소가 정밀하게 조율되고 시각화됐다. 조명 계획이 그림으로 명확히 표현되고 의상과 소품의 색감까지 결정했기에 현장에서 우왕좌왕하지 않았다. 이것만으로 작품 전체를 평가할 수는 없지만, 안무 의도가 효과적 무대 메커니즘을 통해 구현된 것은 분명했다.
백철호는 춤 공연에서 안무와 시노그래피가 충돌할 위험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춤에서 이미지가 중요해 시노그래피는 큰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여러 분야 전문가와 함께 만드는 공연예술에서 각 전문가의 역량을 최대한 결집하는 것은 개인 역량의 한계를 극복하는 창작 방식이다. 안무자 혼자 많은 부하를 지고 가는 지금까지의 방식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 시노그래피와 같이 아직은 낯선 방식이라 하더라도 시도해보아야 한다. 굽히지 않고 뛰어오를 수 없다. 춤에서 굴신(몸을 굽혔다 폈다 하는 행동)은 그런 뜻도 포함한다.
춤 비평가·민주주의사회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