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름 덮어쓴 듯 볼품없어 보여도
- 버릴 것 하나 없는 지역특산물
- 이름 ‘미즈가레이’ 日語서 유래
- 3~6월 산란철 알배기는 밥도둑
- 뼈 연해 통째 썰어 회로 먹고
- 여름엔 얼렸다가 꺼내 회무침을
- 마당에 줄줄이 걸어 해풍에 말려
- 무치고 찌고 굽고 찌개로 먹어
- 가슬가슬 식감에 지느러미도 꿀꺽
겨울에서 봄으로 가는 동해안, 특히 강구나 축산 등 영덕지역을 여행할 때면 항구 주변에 유숙하는 경우가 많다. 포구의 정취가 편안할 뿐만 아니라 맛깔스러운 먹거리도 풍부하고 사람들 인심도 특별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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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주구리 구이(왼쪽), 미주구리 조림 |
새벽녘이면 먼동이 트기 전, 어둠 속 바다를 건너 만선의 고깃배들이 항구로 들어서는데, 물 칸마다 대게, 오징어, 청어, 방어, 가자미 등 싱싱한 어족이 가득가득하다. 특히 봄기운이 돌 즈음이면 주홍색 알이 통통하게 밴 ‘미주구리’가 지천으로 올라와 영덕 사람들 마음을 설레게 한다.
영덕의 해변 마을을 걷다 보면 집집마다 미주구리를 줄줄이 걸어놓고 해풍에 말리는 모습을 쉬 볼 수가 있다. 이 말린 미주구리는 영덕지역의 특산물로 영덕 사람들이 일 년을 함께할 귀중한 저장성 식재료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 궁금궁금, ‘미주구리’의 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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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물전에서 파는 미주구리. |
미주구리. 영덕을 중심으로 동해안 해역에서 어획되는 가자미목 가자밋과의 생선이다. 표준 학명으로는 ‘기름가자미’. 얼핏 보면 기름을 덮어쓴 것처럼 후줄근하여 볼품없어 보인다. 몸을 보호하기 위해 미끌미끌한 기름 성분의 점액질을 분비하기에 그렇다.
‘기름가자미’는 우리나라의 동해를 비롯해 일본의 해역, 오호츠크해, 북태평양 등에 분포한다. 25㎝ 안팎의 크기로 수심 200~300m의 깊은 바닷속 펄이나 모랫바닥에 주로 서식한다. 산란기는 3~6월이다. 다른 가자미와 달리 지느러미가 검은 것이 특징이다. 그런데 ‘미주구리’라…. 이름 한 번 이상타! 왜 영덕 사람들은 기름가자미를 미주구리라 부르는 것일까? 미주구리는 일본에서 건너온 ‘미즈가레이(みずがれい)’가 우리식으로 토착화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일본말로 ‘물가자미’란 뜻. ‘미즈(みず)’는 물, ‘가레이(がれい)’는 가자미를 뜻한다.
일제강점기 포항을 비롯한 동해안 여러 어항은, 일본인들의 주도하에 조선 수산물 수탈의 전진기지 역할을 해왔다. 당시 동해의 싱싱한 수산물이 일본으로 대량 반출되는데, 그중 ‘무시가레이(むしがれい)’라고 불리는 ‘물가자미’도 있었을 터이다. 이 ‘무시가레이’를 동해와 인접한 일본 시마네현 어부들은 ‘미즈가레이’로 불렀는데, 이것이 우리식 발음의 ‘미주구리’로 변형됐을 것으로 추정한다.
원래의 ‘물가자미’는 남해안을 중심으로 잡히는 어종으로, 등 쪽에 검은색과 유백색의 크고 작은 반점이 산재해 있고, 6개의 흑갈색 원형 반점이 있다. 지역에 따라서 ‘살가자미’라고도 불린다. ‘기름가자미’의 정식 일본 학명은 ‘히레구로(ヒレグロ)’이다. ‘지느러미(히레)가 검다(구로)’는 뜻을 가졌다. 몸체에 기름기가 많다고 ‘아부라가레이(あぶら(油)がれい)’라고도 한다. 영미권에서는 ‘코리언 플라운더(korean flounder)’라 불린다.
■ 이래서 최고 음식 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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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주구리 말리는 모습. |
동해안에서는 기름가자미와 물가자미 모두를 ‘미주구리’로 혼용하여 부르고 있다. 현재 영덕의 미주구리는 기름가자미를 말한다. 지자체에서는 미주구리를 순화해 물가자미로 부르는데, 이는 잘못이다. 기름가자미로 하든지, 영덕식 이름으로 정착하여 영덕 사람들이 널리 부르는 미주구리라 하는 게 맞지 않나 싶다.
미주구리는 살이 부드럽고 담백하여 꽤나 맛있는 생선이다. 뼈가 연해 뼈째 회로도 먹고, 무쳐도 먹고, 찌거나 굽거나, 찌개로도 끓여 먹는 등 다양한 요리로 활용이 가능한 팔방미인급 어종이다.
어획량이 풍부한 데다 ‘썩어도 파리가 잘 꼬이지 않는다’고 할 정도로 탈도 잘 안 나면서, 말리거나 심지어 냉동해놓고 두고두고 먹기에도 좋다. 이 때문에 서민에게는 유용하면서도 다양한 음식으로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최고 식재료로 첫손 꼽힌다.
출향 인사들이 고향 영덕을 그리며 먼저 떠올리는 음식 또한 미주구리 음식들이다. 이는 어릴 적 밥상에 빠지지 않고 올라온 생선이면서 마을 잔치나 대소사에 빠져서는 안 되는 음식이었기에 그렇다. 전라도의 홍어, 경북 내륙의 돔배기 정도로 생각하면 되겠다.
미주구리는 살이 부드럽고 뼈가 연해 주로 물회나 회무침으로 먹는데, 뼈째 씹히는 식감과 담백하고 구수한 맛이 일품이다. 새콤한 초장에 오이, 배, 미나리, 무 등을 채 썰어 넣고 맛깔스레 무쳐서 먹으면 아삭아삭, 새콤달콤하면서도 고소하고 상쾌한 맛에 저절로 입맛이 돈다. 여기에다 소주 한 잔 곁들이거나 밥을 비벼 먹으면 더할 나위 없다. 영덕 사람들은 가슬가슬한 식감이 좋아 ‘지느러미(날감지)’도 제거하지 않고 먹는단다.
말린 것도 아주 유용하게 쓰인다. 집집마다 마당에 미주구리를 줄줄이 걸어놓고 해풍에 말려, 밥물에 쪄서 양념해 먹기도 하고, 은근한 연탄불에 구워 먹기도 하고, 얼큰하게 끓여 찌개로도 해 먹는다. 또한 번철에 기름을 넉넉히 두르고 자글자글 튀기듯 하여 통째로 바싹바싹 씹어 먹기도 한다. 특히 산란철 빨간 알이 꽉꽉 들어찬 알배기는 최고의 밥반찬으로, 부드럽고 고소하기가 따라올 생선이 없을 정도다.
■ 회무침, 물회, 밥식해, 찌개, 구이
영덕 사람들은 이 미주구리를 냉동해 사철 내내 두고두고 밥 먹듯 회무침으로 만들어 먹는다. 특히 여름철이면 미주구리를 냉동실 넣어두고 조금씩 꺼내 무쳐 먹는데, 여름 입맛을 제대로 살려주기에 계절 음식으로도 제격이다. 뼈째 먹기에 칼슘 공급원으로도 더할 나위가 없어, 성장기 어린이나 노년의 뼈 건강에도 아주 유효하다. 영덕 사람들은 주위 사람이 골절이 되면 이 미주구리를 선물하기도 한단다.
미주구리로 영덕의 또 다른 소울푸드 ‘밥식해’를 만들어 먹기도 한다. 미주구리를 이틀 정도 소금에 절였다가 깨끗이 장만한 뒤, 꾸덕꾸덕 말려서 먹기 좋게 잘라, 조밥, 고춧가루, 마늘, 엿기름 등에 버무려 1주일 정도 발효시키면 입맛 도는 밥식해가 된다. 영덕 사람들은 밥식해를 사시사철 밥상에 밥반찬으로 올려, 입맛을 돋우고 건강도 챙기는 것이다.
풍부한 어족 자원이면서 서민에게는 친숙한 식재료로 사랑받아온 미주구리. 미주구리는 봄기운 도는 3월 즈음부터 슬슬 맛이 올라온다. 봄이 완연해질 때 영덕 축산항 인근에는 미주구리로 축제를 벌이기도 한다. 동해안을 여행하다가 문득 입맛 도는 음식이 먹고 싶을 때, 동해안 사람들의 봄철 소울푸드 ‘미주구리회’ 한 접시 받아보는 것도 기꺼울 터이다.
음식문화 칼럼니스트·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