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음악가 아들 꿈꾼 母 덕분 입문
- 타악기 비상임 단원으로 시작해
- 정단원, 부수석, 수석으로 승급
- 부산시립교향악단 30년 지켜
- 은퇴 후 오케스트라 교육에 관심
- 청소년·은퇴자 아카데미 지휘
- 자선 오케스트라 유코도 만들어
- 13년간 5억7000만 원 사회기부
- “연주자는 관객 위해서 연습
- 지역 기여할 대화의 장 필요”
1921년생 김준한의 고향은 평안북도 선천이다. 한국전쟁 중 피란해 부산 동구에 자리 잡았다. 성남초등학교 앞에서 장사하던 어느 날 우연히 미군 군악대 공연을 보았다. 경쾌한 관악기 소리가 피란살이 고단함을 잠시나마 잊게 해 주었을까. 그 소리가 좋아 아들을 낳으면 음악을 시키겠다고 생각했다. 아들 하나를 폭발물 사고로 잃고, 서른여섯에 낳은 아들이 음악을 했다. 그가 팀파니스트 전영수(62)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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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 남구 대연동 유코 오케스트라 연습실에서 만난 팀파니스트 전영수. 여전히 악기 앞에 앉아 연습에 열중하고 있다. 김종진 기자 |
■ 부산시향 제2의 지휘자
팀파니는 오케스트라에서 제2의 지휘자로 불리는 악기다. 음악의 베이스라인을 형성하고 리듬의 중심을 잡는 한편 극적인 효과를 창출하기 때문이다. 전영수는 1986년부터 2015년까지 29년10개월 동안 부산시립교향악단에서 그 역할을 맡았다. 정년퇴임한 지 3년이 넘었지만, 팀파니를 앞에 두고 정면을 응시하는 그의 날카로운 눈빛과 예리한 타격을 기억하는 관객이 적지 않다.
“합주 시작 2시간 전쯤 도착합니다. 그날 연습할 곡에 맞춰 북 하나하나 음정을 조율하고 밸런스를 맞춥니다. 손이 많이 가는 악기죠. 갖고 다닐 수도 없고 시끄러우니 남들 오기 전에 일찍 출근해 조율하고 손 푸는 거지요.” 오랜 세월 동안 무리한 탓일까. 요즘 어깨와 팔꿈치 통증으로 병원 신세를 지는 일이 잦다. 완치할 수 없지만 평생 음악 하다 얻은 병이니 때론 훈장처럼 여겨진다고 한다. 악기 연주하는 사람들은 다 고질병 하나씩 있다며 대수롭잖게 어깨를 움직이지만 통증이 표정에 묻어난다.
처음엔 타악기 비상임 단원으로 입단했다. 대개 팀파니는 타악기 주자 중 수석 주자가 연주한다. 그런데 전임자 퇴임 후 지휘자가 시범 삼아 연주를 시켜본 이후 계속해서 그가 팀파니를 맡게 됐다. 당시 월급은 6만4000원. 분윳값 대기도 벅찼지만 그렇게 맡은 팀파니를 잘하고 싶어 주말이면 서울로 공부하러 다녔다.“분유가 떨어져 깡통 바닥을 긁는 소리가 너무 싫었어요. 아기들이 분유를 그렇게 많이 먹는지 몰랐습니다. 야간업소에서 일할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밴드 주자가 사정이 있어 빠질 때 가끔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3일 일하면 두 달 치 월급을 받았어요. 이리저리 버텼지요. 아내가 고생 많았어요.” 1년 후 정단원이 됐고, 오디션을 거쳐 부수석, 수석으로 승급했다. 벌이 좋은 다른 일을 할까 고민도 했지만, 버티며 기량을 쌓은 세월이 아까워서 음악을 그만둘 수 없었다. “버티면서 행복하면 버텨보는 겁니다. 나만 왜 이럴까 하는 생각은 버려야 하고요. 다른 분야도 좋은 직장을 갖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좋은 여건이 마련되면 좋겠지만 현실은 늘 그렇지 못해요.”
■ 음악 통한 사회 공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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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시향에서 팀파니를 연주하던 모습.
부산시향 제공 |
후배 연주자를 보면 선배로서 해줄 말이 없다. 생활고로 음악을 그만두거나 극단적 선택을 하는 일이 결코 개인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음악가는 관객을 위해 연습합니다. 넉넉한 월급보다 매일 함께 음악을 하고, 관객을 만날 수 있길 바랍니다. 서울에는 구립 오케스트라만 2곳 있어요.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음악가가 지역사회에 좋은 역할을 하도록 만들 수 있을 텐데…. 최소한 대화의 장이라도 마련되면 좋겠습니다.”
그는 요즘 오케스트라 교육에 관심이 많다. 청소년 오케스트라와 은퇴자로 구성된 아카데미 오케스트라를 지휘한다. “국내 음악교육은 솔리스트 양성, 콩쿠르 입상, 좋은 대학을 목표로 한 무한경쟁 속에 이뤄졌습니다. 물론 한 악기를 빼어나게 잘 다루는 것은 좋습니다. 그런데 합주 교육은 자기 소리를 내야 할 때, 다른 사람 소리를 들어야 할 때, 그리고 지휘자를 보며 방향을 설정할 때를 알게 합니다. 사회생활의 기초이자 삶의 지혜이기도 하지요.”
자선 오케스트라 유코(UKO) 역시 그의 손에서 태어났다. 난치병 어린이 환자의 사연을 접하고 시작했는데, 지난 13년간 5억7000만 원 기부라는 성과를 냈다. “음악을 통해 사회에 작게나마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뜻을 함께한 초창기 멤버와 스타자동차 유재진 회장님의 도움이 컸습니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는 성격이라 좌충우돌하는 일도 많았죠. 곁에서 잘 수습해준 주변 분과 단원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는 ‘조방 앞’(동구 범일동)에서 태어났다. 당시만 해도 이른바 ‘우범지역’이었다. 행여 맞고 다닐세라 유도를 가르쳤더니 일찍부터 밖에서 사고 치기 일쑤였다. 열네 살 크리스마스 날, 어머니는 고급 기타와 일제 녹음기를 사 주었다. 밴드 공연을 보며 어머니가 품었던 꿈이나, 자식이 엇나가지 않길 바랐던 간절한 모정은 헤아리지 못했지만, 독학으로 기타를 하던 그때 음악을 좋아하게 됐다. 평생 직업이 되리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지만 음악으로 30여 년을 보냈다. 지금도 옷장 앞에는 2016년 돌아가신 어머니 김준한의 사진이 놓여 있다. 퇴임 전 마지막 공연에서 끝내 눈물을 흘리며 연주한 베토벤 교향곡 제9번 3악장으로 그리운 어머니를 불러본다.
공연기획자·인제대 외래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