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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영희가 만난 무대 위의 사람들 <10> 지휘자 곽승

부산 교향악 세계에 알린 곽승, 그의 지휘는 하나의 우주다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9-06-02 18:44:14
  •  |   본지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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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등 밴드부서 트럼펫으로 시작
- 서울시향 거쳐 매네스음대 진학
- 1년 안 돼 지휘과로 전향해 두각

- 영주권 없어 생활 위해 택시운전도
- 발레단 매니저와 ‘기적’ 같은 만남
- 50년간 3000여 공연 지휘 이어져

- 견고하고 균형잡힌 지휘로 정평
- 모든 것 쏟아부은 곳이 부산시향
- 한국 교향악단 최초 카네기홀 공연

1891년 개관한 뉴욕 카네기홀은 음악인이라면 누구나 꼭 한 번쯤은 오르고 싶은 꿈의 무대다. 1997년 6월 14일 부산시립교향악단이 대한민국 교향악단 최초로 이 무대에 올랐다. 단 한 줄의 언급조차 인색하기로 유명한 뉴욕타임스가 ‘대편성 오케스트라와 절묘한 조화를 이룬 한국의 전통 가락’이라는 제목의 리뷰를 실었고, 동아일보는 ‘한국에 이런 교향악단이 있었습니까’라며 지역 교향악단의 선전에 경의를 표했다. 부산시향이 미국에서 활동 중이던 마에스트로 곽승(78)을 초빙한 지 1년여 만의 일이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어찌 한국의, 그것도 변방이라 할 만한 부산의 교향악을 세계에 알릴 수 있었을까. 당시 창간 50주년을 맞은 국제신문의 후원도 한몫했다.

■ 50년 동안 3000여 회 지휘

   
뉴욕 카네기홀에서 부산시립교향악단을 지휘한 마에스트로 곽승. 부산시향 제공
곽승은 미국 매네스음대를 졸업하고 아메리칸발레단, 조프리발레단, 애틀랜타심포니, 클리블랜드오케스트라 등을 거쳐 오스틴심포니 음악감독을 지냈으며, 세계 30여 곳의 오케스트라를 객원 지휘했다. 매네스음대, 퀸즈칼리지, 텍사스대 교수를 비롯하여 베네수엘라 엘 시스테마에서 구스타보 두다멜 등 세계적인 지휘자를 길러내기도 했다. 국내에서는 부산시향, 대구시향, 서울시향, KBS교향악단에서 음악감독, 음악고문 및 지휘자로 활동했으며, 경희대 석좌교수, 계명대 특임교수를 지냈다. 1990년 평양에서 열린 범민족통일음악제와 2000년 서울에서 열린 남북한교향악단 합동연주회를 지휘한 이도 곽승이다. 50년 동안 3000여 회의 공연 지휘, 미국 교향악단 경력만 해도 30여 년에 이른다. 지금까지도 그를 제외하고는 다른 사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가 처음으로 음악교육을 접하게 된 계기는 중학교 밴드부였다. 상급생이 주요 악기를 차지하니 3학년 말에야 겨우 멜로디 악기를 손에 잡을 수 있었다. 트럼펫이었다. “입술이 곪고 터져서 고름이 나도 밤을 새우며 연습했어요. 재미있어서도 아니고, 앞으로 뭘 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어서도 아닌데 그냥 그렇게 열심히 연습했습니다.” 선생님은 7~ 8개월 만에 자신이 가르칠 것은 다 가르쳤다며 다른 선생님을 소개했다. 본격적으로 트럼펫을 배운 지 2년 만인 고2 가을, 서울시향과 하이든 협주곡을 연주한 일을 계기로 서울시향 제2 트럼펫 주자가 되었다. 당시 서울시향에는 권세가 자제들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른바 엘리트 음악가들이 협연하던 때였으니, “빡빡머리 쟤는 누구야?”라는 웅성거림이 잦아들지 않았다. 1958년부터 1961년까지 서울시향에서 연주하면서 전액 장학금을 받고 경희대에 진학했다.

■ 뉴욕 택시 운전사에서 지휘자로

   
1997년 6월 14일 부산시향의 뉴욕 카네기홀 공연 모습.
1961년부터는 예그린악단에서 활동하다가 1964년 악단이 해산되자 곧 KBS교향악단에 입단했다. 그즈음 예그린악단의 관현악 지휘자 김생려가 단원 몇몇을 다시 모아 민속예술단을 꾸렸다. 1년 정도 KBS교향악단과 민속예술단 활동을 병행하던 중 그는 민속예술단의 유럽 6개국 및 미국 18개 도시 순회 연주 길에 함께 오른다. 이 여행은 그를 인생의 두 번째 페이지로 안내한다. 1965년 5월 뉴욕 퀸즈 세계박람회 연주를 끝으로 단체는 해산했지만, 그는 미국에 남아 그해 9월 매네스음대에 입학한다. 전액 장학생이었다. 식당에서 접시를 닦고 학교 근로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었다.

학교에 다닌 지 1년이 채 못 되어 트럼펫에서 지휘로 전향했다. “매네스음대는 지휘과가 특히 유명했어요. 학장이 직접 교수들에게 기초자질과 지휘자로서의 가능성을 일일이 문의한 다음, 오디션을 보게 했지요. 오디션에 합격하고 막상 수업에 들어가니 12명의 학생이 있었는데 모두 쟁쟁한 연주자였습니다.” 동기생들은 유명 피아니스트, 커티스음대 강사 등 그와는 출발부터 달랐다. 1968년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동기들을 제치고 아메리칸발레단 지휘자로 추천을 받은 것이다. 발레단 예술감독이 오디션을 보러 왔고, 학교에서는 별도의 경비까지 들여 조력했다. 오디션에 합격하자 학교가 떠들썩했다. 접시닦이로 주급 50달러를 벌다 주급 450달러를 받게 됐다. 그러나 영주권이 없었기 때문에 1년6개월 후 발레단을 그만두어야 했다. 1971년 매네스음대를 수석으로 졸업했지만 지휘자 자리는 매우 한정적이었다. 뉴욕처럼 대도시라도 대여섯 남짓에 불과하니 생활을 꾸리기 위해서는 다른 일을 해야만 했다. 운명이었을까. 그는 택시 운전을 시작했다. 지리를 잘 몰라 욕설을 듣는 일도 많았고 큰 사고를 겪기도 했다. 어느 날 조프리발레단이 상주하는 시티센터 근처에서 한 승객을 태웠다. 그런데 드라이버의 사진과 이름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네는 곽승 아닌가. 믿을 수 없군” 연신 되뇌었다. 그는 아메리칸발레단에서 조프리발레단으로 자리를 옮긴 매니저 윌리엄 크로프우드였다. 몇 달 뒤 조프리발레단에서 연락이 왔다. 우연도 운명도 아니었다. 거의 기적에 가까웠다. 1972년부터 1977년까지 주 8회, 연 208회, 엄청난 횟수의 공연을 지휘했다. 그의 실력은 나날이 단련되어 갔다.

■ 세계적 거장의 상찬 “특별한 재능을 지닌 지휘자”

   
공연을 알리는 포스터.
1977년에는 626 대 1의 경쟁을 뚫고 애틀랜타심포니 부지휘자가 됐다. 장장 30일에 걸친 엄격한 오디션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지 2시간 만에 “내일부터 곧바로 출근하라”는 지휘자 로버트 쇼의 연락을 받았다. 3년 후 로린 마젤이 이끄는 미국의 5대 교향악단 중 하나인 클리블랜드오케스트라의 부지휘자로 또 3년을 보냈다. 지휘뿐만 아니라 오케스트라를 경영할 수 있는 음악감독의 역량을 갖추게 된 그는 1983년부터 14년간 텍사스주 오스틴심포니 음악감독으로 활동했다.

기악과 달리 지휘는 테크닉이 비교적 간단하다. 제대로 된 숙련 기간을 거치지 않고 짧은 수학만으로도 지휘봉을 들고, 심지어 음악감독 자리를 꿰차는 경우도 허다하지만 오래가기 어렵다. 지휘자의 음악성과 리더십은 거짓으로 꾸며낼 수 없기 때문이다. 클라우디오 아바도, 주빈 메타 등을 길러낸 전설의 거장 한스 스바로프스키는 곽승을 “특별한 재능을 지닌 매우 뛰어난 지휘자”라고 상찬했다. 단 하나의 음조차 소홀히 하지 않는 견고하고 균형 잡힌 지휘는 연주자와 애호가들 사이에 정평이 나 있으며, 곽승 특유의 진지한 작품 해석은 깊고 중후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그의 재능과 경험이 응축된 세상의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향유하는 셈이다.

“모두 저마다의 재능을 타고나는데 저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음악을 재능으로 받았으니 축복받은 사람이지요. 음악이 무엇인가조차 생각하지 않았고 망설이거나 방황하지도 않았어요. 돌아보면 인생의 전환점들이 자연스럽게 찾아와 음악만 하고 살았으니 얼마나 행운인지 몰라요. 그저 한없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 부산시향 8년11개월…악보에 남은 숨결

1996년 곽승의 부산행에는 그 나름의 뜻한 바가 있었다. “일생 오케스트라에서 일했으니 음악부터 살림살이까지 그동안 내가 쌓아둔 모든 것을 쏟아부어 이 오케스트라를 반드시 발전시켜야겠다 결심하고 왔어요. 미국 공연도 그런 차원에서 추진한 도약의 계기였습니다. 단원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힘을 모아 좋은 성과를 거두었지요.” 8년11개월간 부산시향을 이끌면서 악단 발전을 위한 기초 시스템을 정비했고, 음악적인 면도 한층 성장시켰다. “음악은 템포예요. 일정한 시간 안에 숨을 쉬어야 하고, 음악이 표현하는 감정마다 그 숨의 맥이 다릅니다. 이것을 함께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지휘자의 역할입니다.” 그가 부산을 떠난 지 16년이 흘렀지만, 악보 곳곳에서 여전히 그의 음악적 숨결을 생생히 기억하는 단원이 적지 않다.

   
어쩌면 역사는 기억으로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기억하지 않으면 마치 없었던 일처럼 쉽게 잊힌다. 22년 전 6월에 있었던 부산시향의 카네기홀 공연도, 무대 위 예술가의 삶과 열정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망각이 못내 안타까워 글로 갈무리하는 일은 어리석은 자의 몫이리라. “내가 할 수 있는 일,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한 일을 했을 뿐”이라는 그는 이즈음 유유히 책과 우주에 빠져 있다. 악보만 들여다보느라 못 읽은 책이 너무 많고, 허블망원경이 찍은 우주와 지구 모습도 기가 막히게 아름답고 신기하다 한다. 문득 2003년 그가 지휘한 말러 교향곡 제1번이 떠오른다. 곡이 끝나자 일순 정적이 흘렀고 우레와 같은 박수로 공연장이 떠나갈 듯했다. 그 순간 우리를 우주로 안내한 이는 말러였을까, 마에스트로 곽승이었을까.

공연기획자·인제대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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