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뮤지션 대학생 직장인 어르신 등
- 국경·나이 넘어 음악으로 교류
- 장르 초월 중구난방 신청곡 홍수
- 나도 몰랐던 음악취향 알게해줘
지난 토요일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각. 갑자기 지글거리는 LP 음악이 멈추고, 얼큰하게 취한 청년이 기타를 들고 무대에 올랐다. “노래 한 곡 하께예.” 유려한 블루스 기타 연주와 카랑카랑한 목소리. 독보적인 컨트리 블루스 뮤지션 김태춘의 예고 없던 우발적 공연이었다.
| |  |
| 컨트리 블루스 뮤지션 김태춘이 경성대 앞 라이브 펍 OL’55에서 노래 부르고 있다. |
익숙한 가게들이 사라지고, 생소한 가게들이 들어서는 경성대 앞 대학가에서 15년 가까이 우직하게 버티고 있는 라이브 펍(남구 대연동 광진빌딩 B1)에선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일이다. 미국의 음유시인 톰 웨이츠가 1973년에 발표한 첫 번째 앨범에 수록되었고, 이듬해 이글스가 발표해 널리 알려진 OL’55란 노래에서 이름을 따온 부산의 대표적인 펍이다. 비틀스의 노란 잠수함이 그려진 입구 간판엔 ‘Cavern Club(캐번클럽)’이란 부제가 달려 있다. 지하로 내려가면 붉은 벽돌로 이뤄진 긴 공간 끝에 자리 잡고 있는 무대가 비틀스가 수백 번 공연했다는, 사진으로만 본 리버풀의 전설적인 라이브 클럽인 ‘Cavern Club’을 연상시킨다.
매주 수요일 저녁, 누구에게나 열린 오픈 마이크 무대에서는 아마추어의 연주부터 블루스, 재즈, 포크, 록 등 다양한 장르의 뮤지션으로 현장에서 급하게 결성된 밴드의 즉흥 연주, 어쩌다 운이 좋은 날이면 투어 중인 유명 밴드의 깜짝 공연이 펼쳐지기도 한다.
수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운영되는 OL’55에선 수요일 외에도 아지트처럼 드나드는 뮤지션들의 요청에 따라 무대를 열어주고 있다. 간혹 마땅한 합주실을 찾지 못한 인디밴드도 자주 애용하는 편이다. OL’55에서는 뮤지션과 대학생, 넥타이 맨 직장인, 백발 어르신뿐만 아니라 각자 모국어로 수다를 떠는 세계 각국에서 온 청년이 서로 말은 통하지 않아도 함께 연주하고 노래하며 음악이란 공통분모로 세대와 국경을 넘는 교류가 활발하게 이뤄진다.
다양한 연령층과 국적을 지닌 이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공간이다 보니 신청곡 역시 산울림, 신중현, 신촌블루스 같은 추억 어린 노래들부터 록, 재즈, 팝, 힙합, 레게, 블루스, 일렉트로니카 등 맥락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중구난방일 때가 많지만 스스로 깨닫지 못한 숨겨진 음악 취향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OL’55 단골 중 나보다 한국말을 조금 더 잘하고 가끔 기타로 지드래곤 노래를 부르는 프랑스 노르망디 출신의 어느 여인은 새로운 한국 노래들을 배우고 있으며 연습이 끝나는 대로 무대에서 불러주겠다고 약속했다. 제목을 물으니 ‘인생은 나에게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안치환) ‘만나고 싶은 사람’(장미리) 두 곡이었다. 부끄럽게도 난생처음 들어보는 노래다. 이곳은 가끔 내게 힙스터의 기본소양 중 하나인 ‘겸손’의 가치를 새삼 깨닫게 한다.
20년 넘게 부산에서 인디밴드를 이끌고 있는 한 단골 뮤지션은 OL’55는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는 곳이라고 정의했다. 마음껏 무대를 쓸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음식물 반입 또한 환영한다고 한다. 가게 한 벽면을 빼곡하게 채운 수천 장의 LP 중 전설로만 떠돌던 빛바랜 희귀 명반이 허다하게 발견된다. 사장님께 부탁해 턴테이블에 올려 음악을 청해 들으면 유튜브로 간편하게 찾아 듣는 것과 또 다른 깊은 맛을 느낄 수 있다. 요즘 뉴트로, 복고열풍이 유행이라고 하지만 역시 오리지널을 이기지 못한다.
지난해 OL’55는 정리를 위해 잠깐 문을 닫았던 적이 있으나 갈 곳 잃은 뮤지션과 단골의 성화에 못 이겨 다시 문을 열었다. 우리는 지금껏 얼마나 많은 소중한 공간을 추억 속으로 떠나보내야 했는가. 이제는 지켜야 할 때다. 쉼 없는 방문으로 응원하자.
분명 누군가에겐 신세계의 발견일지도 모른다. 작가·다큐멘터리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