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신문과 국제아카데미 주최로 지난 25일 부산 남구 대연동 BNK 부산은행 본점 대강당에서 열린 철학자 김형석 박사 초청 특별강연회의 상세한 내용을 싣는다. ‘100세의 현역 철학자’로서 널리 존경과 사랑을 받는 김형석 박사는 넓은 안목과 오랜 경험, 부지런한 관찰과 깊은 사유를 바탕으로 우리 사회 희망의 근거에 관해 열강했다.
- 일제강점기에도 6·25전쟁 때도
- 희망 잃지 않던 고유의 민족의식
- 세계가 놀란 초고속 성장 원동력
- 교육보급 전 세계서 손꼽히지만
- 독서량은 갈수록 줄어드는 추세
- 강연서 고전 외면 현실 보면 씁쓸
- 정신적 역량 없이 나은 미래 없어
- 군사·경제 기준 강대국 좇기보단
- 한글문화 바탕 인문학 힘 키워야
-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한 탐구
- 100년 뒤 한국의 자랑거리 될 것
- 문화 강대국 토대 지금부터 닦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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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자 김형석 박사가 지난 25일 BNK 부산은행 본점 대강당에서 한국의 미래와 희망에 관해 강연하고 있다. 박수현 선임기자 |
1. 3·1운동, 전환이자 출발=100년 전인 1919년 3·1 운동 이전에는 우리 민족 생활의 단위가 가정이었다. 그런데 일제에 의해 나라가 무너지고 주권을 뺏기면서 민족과 국가가 먼저라는 데로 인식이 확장됐다. 그런 인식이 3·1운동이라는 계기로 더욱 높이 올라갔다. 이와 더불어 교육의 필요성을 강렬하게 느끼게 됐고, 교육기관이 짧은 시간에 엄청나게 생겼다. 그 영향은 지금까지 이어져 한국은 아시아에서 교육이 가장 잘 보급된 나라로 꼽힌다.
애국심·단결심을 바탕으로 민족의 장래와 국가의 미래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바쳐도 되겠다는 정서 속에 나라를 다시 찾게 됐고, 6·25전쟁을 겪으면서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간 게 아니라 그런 인식이 더 강해졌다. 우리 민족은 희망과 미래가 있다는 기대 말이다.
2. 앞으로 100년, 중요한 건 문화력=제2차 세계대전 뒤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빨리 성장한 나라는 독일 일본 이스라엘이다. 그다음으로 한국을 꼽는다. 한국은 정말 빨리 성장해서 여기까지 왔다. 과거 100년이다. 앞으로 100년쯤 지난 뒤 한국이 어떤 위치에 올라갈 수 있을까 생각해본다. 주위 다른 나라는 전부 (군사·경제 면에서 외형적으로) 부강한 강대국이 되기를 원한다. 일본 중국 러시아가 다 그렇다. 여러 이유로 볼 때 한국은 그 나라들과 경쟁해 그와 같은 방면으로 강대국이 된다는 생각은 좀 하기 어렵다.
그런데 100년 뒤를 생각하면, 국민과 나라의 성장·행복을 구분하는 표준이 달라질 것이다. 얼마 전까지는 군사력, 정치의 민주화, 경제력이 표준이었다. 하지만 100년쯤 지나면 ‘어느 나라가 제일 문화의 혜택을 많이 받고 있는가’하는 점이 기준이 될 것이다. 인류 역사가 그렇게 흐르고 있다. 앞으로 유엔은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인데, 강대국보다 한국만 한 규모를 가진 나라의 발언권이 더욱 높아질 것이다. 그리고 ‘문화의 혜택을 국민이 얼마나 받으며 문화의 힘을 얼마나 쥐고 있는가 하는 점이 중요한 기준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가 문화의 혜택이 크고 국민이 행복하게 사는 나라가 되려면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그 하나가 독서다.
3. 한글문화권이라는 희망의 근거=지난 100년에 걸쳐 그리고 오늘날에도 세계에 문화의 혜택을 주고 있는 나라로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일본을 꼽는다. 공통점은 ‘국민의 절대다수가 지난 100년 이상 독서를 한 나라’이다. 독서하지 않으면 정신적 불모지가 되고 학문 예술 사상도 자라지 못한다. 요즘 한국에서 독서를 너무 안 하는 경향은 염려스러워 교육 제도 등을 걱정하게 된다. 이제 한글이라는 한국의 인문적 바탕을 들여다보자. 몇 천 종류에 이르렀던 세계의 언어가 자꾸 줄어 몇 백 종류만 남은 것으로 안다. 자기 문자를 갖지 못한 언어가 먼저 위기를 맞는다. 스위스는 문화적 혜택이 높은 나라다. 그런데 스위스어·스위스 문자는 없다. 스위스에 가면 독일어, 불어, 영어 문화권이 있을 뿐이다. 세종대왕 때 한글을 창제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겠나? 우리는 중국글자나 일본글자로 편지를 쓰고 있었을지 모른다.
우리에게 한글이 있고, 한글문화권을 만들고 있다.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하면서 한글과 한글문화를 없애려 한 것도 그런 이유다. 100년이 지나면 ‘문화권’으로 경쟁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인문적 바탕인) 한글문화권이 있다. 문화는 작은 나라에서 생겨 큰 나라로 퍼지게 돼 있다.
4. 결국 인문학이다=그렇다면 우리의 ‘문화권’을 어떻게 만들어가야 할 것인가? 사회과학은 사회와 문화의 규모에 한계가 있어 작은 나라가 발전시키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인문학은 나라가 크건 작건 별로 상관없다. 5000만 명쯤 인구가 있는 토양이라면 인문학은 충분히 자란다. 평균적으로 말해서, 우리가 한글문화권을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건 인문학의 발달이다. 그리고 우리 민족이 정말로 축복받은 장점인 예술성을 살려야 한다. 이 두 가지를 가지고 100년 뒤 한국의 자랑거리를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 일은 가능하다.
5. 가장 인간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한국 최대 기업의 신입사원을 대상으로 강연할 때 물어봤다. 대학 4년 동안 ‘이 책은 내게 보석에 해당한다’는 책을 열 권 이상 읽은 사람? 없다. 다섯 권? 거의 없다. 두 세 권 읽은 사람은 180명 가운데 좀 있었다. 고전다운 책을 못 읽었다는 얘기다. 내가 이야기하기를 ‘과장 때까지는 괜찮다. 그러나 부장 이상 올라가면 정신적 빈곤을 느낀다’고 했다. 지도자는 정신적 역량이 있어야 한다. 그래도 인문학의 필요성을 먼저 느끼고 공부하게 하는 곳은 삼성그룹 같은 기업 쪽이다. 외국에서는 기업의 이런 경향이 오래됐다. 이런 분위기는 기업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더 널리 퍼지기 바란다.
인문학이 왜 중요한가 하고들 묻는데, 인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삶의 의미, 인간의 가치, 인간의 목적을 궁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흔히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라고 말한다. 말은 옳은 말 같지만, 타당성은 없다. 예를 들어, 일본 사람이 ‘가장 일본적이 가장 세계적이다’라고 말하고 ‘에스키모가 가장 에스키모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라고 하면 우리가 받아들이겠는가?
가장 ‘인간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 그 전체성 속에 한국적인 것, 일본적인 것, 유럽적인 것이 있다. 인간적인 것이 공통점이다. 그것을 인문학을 통해 가져오는 것이다. 역사 문학 철학 등을 통해 배우는 것이다.
6. 정의가 살아있는 ‘질서사회’로=자유는 인문학 발전을 위해 매우 중요하다. 한때 유럽에서도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등을 배출한 러시아가 독일을 이어 세계 문학을 이끌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사상을 통제하는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그런 예상은 실현되지 못했다. 한국도 권력이나 정치가 인문학을 통제하거나 간섭하면 안 된다.
힘과 권력으로 지배하던 권력시대를 지나, 김영삼 정부 출범과 함께 법이 지배하는 법치 사회가 왔다.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된다. 선진국으로 올라서려면, 법치사회에서 ‘질서사회’로 올라가야 한다. 법이 아닌 양심적인 상식이 지배하는 사회가 질서사회다.
이 시점에 우리는 정의에 관해서 살펴봐야 한다. 좌파에서 보는 정의가 ‘만민의 평등’이라면, 미국 같은 나라에서 생각하는 정의는 ‘더 많은 사람이 선한 자유를 누리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유교·불교·기독교 전통이 있는 우리의 정의는 ‘인간에 대한 책무’가 될 것이다. 인간답게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책임. 이렇게 되면, 그 책임은 정부만의 책임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내가 그 일을 함으로써 인간에게 도움과 행복을 줄 수 있는가 묻자.
우리는 지난 100년 잘 극복해왔다. 우리는 질서사회로 올라서 세계 속에서 주목받는 대한민국이 되자. 그 일은 가능하고, 그 길로 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길에서 문화가 선전해야 한다.
조봉권 문화전문기자 bgjo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