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돌아갈 곳은 결국 새로운 지금”
- 누구나 가진 일상 섬세히 표현
- 창작춤 그룹 ‘연분홍’ 오마주
- 전통춤보다 가까운 과거로 접근
- 동시대 리얼리티 살려내 획기적
커다란 여행 가방 위에 한 여인이 주저앉았다. 가방이 큰 이유는 버리지 못하고 마구 쑤셔 넣은 지난 시간의 생채기들 때문이다. 누구에게도 보일 수 없었던 삶의 생채기는 이제 감당 못 할 짐이 됐고, 몸은 짐의 크기와 무게 때문에 현실에 닿지 못한다. 여인이 가방에 쌓인 먼지를 닦아 입으로 불면 시곗바늘이 된 춤꾼 세 명이 가방을 축 삼아 시간을 거꾸로 돌리고, 툭 치는 소리와 함께 꿈과 현실이 뒤섞인 판타지가 펼쳐진다.
 |
| 지난달 15, 16일 부산민주공원 소극장에서 공연한 댄스 프로젝트 에게로의 ‘회귀’. 사진가 박병민 제공 |
‘회귀’(지난달 15,16일 민주공원 소극장)는 두 가지 요소로 판타지를 만들어 낸다. 그중 하나는 주연인 김미란(부산시립무용단 부수석)의 연기다. 김미란은 기쁘고 슬프고 허탈한 감정 변화를 섬세하게 표현하면서 캐릭터가 처한 혼란한 상황과 감정적 리얼리티까지 전달한다. 마치 팝업 북처럼 가방에서 튀어나온 하얀 종이 집 때문에 상황은 유쾌하고 따스한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으로 바뀌고, 이런 판타지를 만드는 것은 무대 디자이너 김호진의 무대 세트다. 세트는 허술해 보이지만 성긴 구조 사이로 조명과 춤꾼의 감정 그리고 관객의 시선이 부담 없이 스며들게 해 무대 공간을 감성으로 가득 채운다. 아픔인 줄 모르고 꼭꼭 숨겼던 생채기에 대한 처방은 겨우 술 한 병이다. 소주 한두 잔만으로도 어느 정도 잊을 만큼 아픔은 일상과 어깨를 겯고 있었다. 관객에게서 걷어 들인 아픔이 약통에서 산산이 부서져 꽃잎처럼 흩날린다. 그렇다. 나만 그런 줄 알고 그토록 아파했던 일들은 누구나 가진 일상의 다른 모습이었다. 아픔은 나누고 조각낼 수 있었고 심지어 모두가 가진 것이었다. 이제 가방은 감당할 만큼 작아졌고 돌아갈 때가 됐다. ‘회귀’는 피안으로 가는 거창한 여정이 아니었다. 삶에 흔들리면서도 끝내 대지에 두 발을 디디고 서서 지금에 머무는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순간이 아니던가.
회귀할 곳은 새로운 지금이라는 것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주제라면 숨은 의미는 ‘오마주(homage)’에 있다. 오마주는 주로 영화에서 다른 작품이나 작가에 대한 존경의 의도로 다른 작품의 장면과 대사 등을 인용하는 기법이다. 이용진은 예전에 느꼈던 선배들 춤의 감성을 ‘회귀’에서 오마주했다고 말한다. 그가 오마주하는 시기는 부산을 기반으로 활동한 전무후무한 프로젝트형 창작춤 그룹 ‘연분홍’의 전성기다. 연분홍 멤버들은 주제를 유려한 춤과 감성으로 세밀하게 풀어냈고, 이런 방식은 후배 춤꾼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용진은 연분홍의 춤과 직접 접촉하고 그 감성을 알고 있는 마지막 세대다. 김미란을 주역으로 선택한 이유도 김미란을 통해 연분홍 시기의 표현방식과 감성을 재현하려는 의도다.
‘회귀’의 오마주는 단지 존경에 그치지 않는다. 연분홍은 부산을 기반으로 2000년 초까지 10년 남짓 활동을 했고, 이용진은 이러한 지역 춤 역사의 일부를 내면화했다. 문화재라는 이름이 지역의 전통·민속춤을 오히려 지역으로부터 대상화시키고 있는 현실에서 전통춤이 아니라 가까운 시기 지역의 춤 감성을 창작 소재로 건져낸 것은 동시대의 지역 리얼리티를 획득하는 새로운 접근이다. 블랙홀 같은 중앙의 흡입력이 닿지 못하는 지점도 바로 지역의 디테일과 리얼리티다. 내부의 역사를 경험적 사실에 따라 소재 삼은 이런 방식은 지금까지 부산 현대무용 판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심각하고 진지하지만 변별점을 찾기 힘든 작품들에 지쳐갈 때 나타난 이 ‘애잔한 소극(笑劇·farce)’이 어쩌면 부산 창작 춤의 한 전형이 될 듯하다.
춤비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