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광서 열었던 베란다 프로젝트
- 구멍가게 청년과 아가씨의 사랑
- 무대선 못 느낄 생동감·즉흥성
- 10분여 작품 현장 반응 폭발적
- 요즘 거리춤 대규모에 지원 집중
- 야외지만 무대공연과 차이 없어
- 잊고 살던 당연한 가치 들추는 것
- 작고 따뜻한 춤 또 만나길 기대
재작년 이맘때다. 기장 일광해수욕장에서 하야로비 무용단의 야외 춤 ‘베란다 프로젝트’(이하 ‘프로젝트’)를 기획했었다. 베란다 프로젝트는 바다와 땅이 경계를 넘나드는 해변을 베란다로 설정하고 육지와 바다에 얽힌 삶의 이야기를 춤으로 풀어내는 공연이었다. 창작 춤 네 편을 공연했는데, 2년이 지난 지금도 생각나는 춤이 하나 있다. 강용기 안무의 ‘오래된 바다’가 그것이다. ‘오래된 바다’는 해변에서 몇 걸음 들어선 골목에 있는 작고 낡은 구멍가게 ‘바다슈퍼’에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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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기장 일광해수욕장에서 공연한 강용기 안무의 ‘오래된 바다’. 지금은 없어진 작고 낡은 구멍가게 ‘바다슈퍼’와 작품이 어우러져 호평을 받았다. 박병민 사진가 제공 |
구멍가게에 딸린 작은 방에 세 들어 사는 청년은 가게 앞 평상에 앉아 하루를 보내는 백수다. 골목에서 노는 아이들에게 괜한 시비를 걸어 코 묻은 돈을 뜯는 일 말고는 소일거리조차 없다. 청년은 어느 날 슈퍼 앞을 지나는 동네 멋쟁이 아가씨에게 추근거리고,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진다. 사랑하고 다투던 시간이 꿈같이 흘러 노년이 된 두 사람은 처음 사랑을 나눈 구멍가게 앞 의자에 앉아 서로를 다독이며 남은 삶의 여정을 다정히 걸어간다.
10분 남짓의 이 작품은 현장에서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다. 진짜 동네 룸펜을 출연시켰다는 오해를 받은 청년(강용기)과 아가씨(정기정)의 춤과 연기는 이야기를 투박하고 맛깔나게 만들었고, 동네 아이들 역할을 한 10대의 춤과 노래, 현장에서 끼어든 동네 아저씨의 놀라운 춤 솜씨가 어우러져 한여름 해수욕장을 찾은 이들의 감흥을 한껏 돋우었다. 거리 춤은 무대공연에 비해 세밀한 표현과 무대장치를 이용한 스펙터클을 만들지 못하지만, 이 작품처럼 약간의 과장이 만들어 내는 현실보다 더한 생동감과 즉흥성은 무대공연에서 느낄 수 없는 또 다른 재미와 감동을 준다.
얼마 전 우연히 일광에 들렀다가 바다슈퍼가 없어진 것을 알게 됐다. 주위에 카페가 즐비하고 펜션과 모텔이 가득한 동네에 두 사람이 들어서면 어깨가 부딪힐 정도로 작은 구멍가게는 낡은 간판에 ‘슈퍼’라는 이름을 달고 세월을 견디다 기어이 사라진 것이다. 프로젝트를 구상할 때 떠들썩한 관광지에 있으리라고는 도무지 믿기지 않을 만큼 허름한 가게를 보고 떠오른 이야기가 춤이 됐고, 같은 내용으로 보수동 책방 골목에서도 공연했다. 이 작품을 각각 다른 장소에서 공연할 수 있었던 것은 화려하고 규모가 압도하는 곳 뒤편에 존재하는 그늘진 곳이라면 어디서든 그곳의 따스함을 일깨우는 이야기의 보편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소는 사라졌지만 춤은 남았다.
지금부터 가을까지 야외 공연이 늘어나는 시기다. 한때 일 년에 수십 차례 있었던 야외 춤이 어느 순간부터 줄어들고 있다. 작은 규모의 거리 춤보다 페스티벌 형식의 대규모 거리공연에 지원이 집중되고 공연할 장소를 개발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 것이 큰 이유이지 싶다. 야외(거리) 공연에서 규모에 대한 집착이 강해지는 경향은 아쉬운 일이다. 규모에 신경 쓰다 보면 거리공연의 특징인 일상에 스며드는 맛은 사라지고, 일상과 동떨어진 무대만 거리에 덩그러니 생기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경우 사람들은 거리 공연을 본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무대공연을 관조하는 것과 별 차이가 없다. 일상의 작은 것, 너무나 당연해서 가치를 잊어버리는 것, 모른 척 덮어 둔 것에 다가가 말을 걸고 이야기를 들춰내는 일은 거리 춤만이 할 수 있다. 지친 일상에서 우연히 마주친 춤에 마음의 굳은살이 물러지고 소소한 상처 하나라도 치유된다면, 춤이 소중한 세금으로 조성한 지원금을 받을 만하지 않겠는가. 이 여름, 동네 한 모퉁이에서 내 기억의 서랍 속 ‘오래된 바다’처럼 작고 따뜻한 춤을 다시 만나고 싶다.
춤비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