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성·입지 다진 연극 연출가에서
- 서른아홉 살에 제작사 PD 도전
- 연극 +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 부산·서울서 188회 공연 대히트
- 작년 초연작 ‘1976 할란 카운티’
- 부산 뮤지컬 새로운 가능성 제시
- 2021년엔 로봇 출연 연극 제작
- 런던 웨스트엔드서 공연할 예정
- 내놓은 작품마다 파격·실험정신
참신한 기획과 발상이 세상을 바꾼다. 세계적인 오페라단 뉴욕 메트(The Metropolitan Opera)는 2006년 공연 실황 영상서비스 ‘더 메트 라이브 인 HD (The Met: Live in HD)’를 선보였다. 소니 클래시컬 레코드 대표였던 피터 겔브(Peter Gelb)를 영입하면서부터다. 쉽게 접하기 어려웠던 오페라를 방송과 온라인뿐만 아니라 멀티플렉스 영화관에서 저렴하고 편리하게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막대한 제작비와 줄어드는 지원금, 관객 감소로 만성 적자를 면치 못하는 공연예술계에 새로운 돌파구를 제시했다. 베를린필도 2009년부터 ‘디지털 콘서트홀(Digital Concert Hall)’을 운영하여 전 세계의 클래식 관객과 만나고 있다. 창발적인 실험으로부터 촉발된 이러한 변화는 물결처럼 번져나간다.
| |  |
| 심문섭 ‘예술은 공유다’ 대표가 다양한 공연 기획을 이야기하다 광안리 해변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종진 기자 |
■연극 연출가에서 제작사 PD로
2017년 부산에서 ‘캐주얼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가 등장했다. 정통 오페라가 아니라 연극에 오페라를 접목한 특별한 시도였다. 현대 관객 취향에 맞게 재구성한 스토리와 미디어아트가 동원된, 말 그대로 캐주얼한 오페라를 선보여 부산 120회, 서울 48회, 2018년에도 20회나 재상연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부산에서 피터 겔브처럼 새로운 실험을 시작한 이는 과연 누구일까. 광안리 ‘예술은 공유다(Yesweare Production)’에서 공연제작자 심문섭을 만났다.
“정통 오페라와는 거리가 있지만, 대중들이 오페라 하면 느끼는 부담감 역시 존재합니다. 둘 사이에 브릿지 역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오페라를 전혀 몰랐었는데 앞으로 오페라를 보겠다는 분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예술은 삶을 풍요롭고 즐겁게 만들 때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려면 예술도 변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재미가 있어야죠.”
그는 ‘신부, 나비 꿈꾸다’로 2007년 부산연극제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한 연출가였다. 주변을 둘러볼 여유도 없이 작품 활동에만 전념해 1년에 무려 7, 8편의 공연을 올렸다. 연출에만 몰두할 수 없는 형편 때문에 기획과 홍보, 마케팅 등의 역할까지 도맡으며 그야말로 고군분투했다. 그런데도 먹고살기조차 힘들었다. “노력과 의지만으로 극복하기 힘든 잔인한 구조였어요. 무조건 열심히 하기보다는 새로운 전환이 필요했습니다.” 그 무렵 서울에서 아동극 연출 제의를 받았다. 공연이 성황리에 끝나자 작품을 멋진 상품으로 만드는 시스템이 알고 싶었다. 서른아홉 살에 제작사 PD로 입사했다. 연출가로서 이미 상당한 명성과 입지를 가지고 있던 때였다.
“저는 정말로 괜찮았어요. 제작 경험은 전혀 없었으니까요.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하겠다는 마음으로 굉장히 즐겁게 임했습니다. 의상을 세탁하거나 분장 도구를 챙기면서, 또 무대를 점검하면서 비용의 쓰임새나 효율적인 관리 방법을 자연스럽게 터득할 수 있었죠.” 2014년에는 ‘뮤지컬 셰프: 비밥의 새로운 이름’ 중국 순회공연을 추진하였다. 3개월간 중국 28개 도시에서 사흘에 한 번 공연하는 고된 일정을 기꺼이 감당했다. 이때 홍보가 관건이라 판단했다. 한정된 예산 내에서 사진과 영상 제작, 홍보와 마케팅 인력을 추가로 확보했으며, 웨이보 같은 현지 소셜네트워크를 집중 공략했다. 공연 성과는 1년 후 문화 상품화되어 관광객 유치로 이어졌다. 공연 제작시스템의 구축과 경영, 유통 관리가 콘텐츠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2021년 웨스트엔드 진출 계획
“연출자, 예술가, 제작자는 서로 입장이 다릅니다. 각자 추구하는 가치와 소통방식, 직면한 어려움이 다 다르지요. 자신의 입장만 고집해서는 안 됩니다. 작품이냐 상품이냐, 공연의 정체성을 명확하게 하고 무대화 방법을 기획하여 서로를 연결해 주는 일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인식은 지난해 12월 초연된 유병은 연출의 창작 뮤지컬 ‘1976 할란 카운티’에서 빛을 발했다. 작품에 대한 안목과 기획력을 발휘하여 지역 자본과 인력, 유관 기관들의 협력을 이끌어냈다. 올해 1월 영화의전당 재공연을 거쳐 4월에는 서울 홍익대 아트센터에서 상연되어 ‘메이드 인 부산’ 뮤지컬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가 꾸리고 있는 제작사 ‘예술은 공유다’의 다른 콘텐츠 역시 기발하면서도 친숙하다. 로드 플레이 연극 ‘우리엄마정숙이 차여사’, 부산의 근대사를 소재로 한 ‘모던타임즈’, 목욕탕과 몸 담론을 다룬 ‘더 바디’ 등이 대표적이다. 세상 어디든 그곳이 무대가 되고 세상 누구든 배우가 되는 즐거운 경험으로 가득하다. 2021년에는 휴머노이드 로봇이 출연하는 연극 ‘스필리킨’을 계획하고 있다. 원작은 치매 할머니와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기억을 가진 로봇의 이야기지만, 작품에는 몇 분 남지 않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의 삶과 기억을 담고 싶단다. 첫 공연은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열릴 예정이다.
그가 다시 부산에 돌아와 깃든 계기는 심하게 아팠었기 때문이다. 광안리 해변을 걷던 중 문득 ‘하고 싶었던 일을 지금 당장 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1도의 각도 차가 삶과 세상을 변화시키죠. 쉬고 충전할 시간이 있어야 하는데 그럴 때 예술이 필요합니다. 더 많은 분과 예술의 즐거움을 나누고 싶습니다. 예술가들이 정당한 대가를 받고 사회 참여의 목소리를 낼 수도 있으면 좋겠습니다. ‘공유’에는 그런 뜻을 담았습니다.” 태풍이 지나간 광안리 바다의 물결은 잔잔했고 오후의 햇살은 눈부셨다. 연출자로서 태풍 같은 무대를 살던 그는 이제 제작자로서 잔잔하면서도 도도한 물결을 만들어나가고 있다. 그의 손을 거쳐 저토록 반짝이게 될 다음 콘텐츠는 과연 무엇일까.
공연기획자·부산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