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무소재 친구·가족 갈등 대부분
- 형식·내용 회전문 돌듯 반복돼
- 베끼기 아닌 역사적 재해석 시도
- 소재 고갈 지역 춤판에 단비될 것
아르헨티나 소설가 보르헤스의 단편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에서 피에르 메나르(가상의 인물)는 17세기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일부를 그대로 옮겨 적는 것으로 20세기 ‘피에르 메나르의 돈키호테’를 창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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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을 춤으로 해석한 다원 예술 공연 ‘기행문’의 한 장면. 사진가 이인우 제공 |
“그는 또 다른 ‘돈키호테’를 집필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것은 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쓰려고 했던 것은 ‘돈키호테’ 그 자체였다. 그가 원작을 기계적으로 옮겨 쓰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았다는 사실을 덧붙일 필요가 없다. 그의 경탄스러운 야심은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작품과 모든 단어와 모든 행이 완전히 일치하는 몇 페이지를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소설 인용) 피에르 메나르의 작업은 ‘베끼기’가 아니라 두 작품 사이 300여 년이라는 역사적 거리로 인해 ‘다시 쓰기’가 됐다.
지금 부산의 춤은 형식과 주제의 빈곤에 처해있다. 새내기 춤꾼의 안무 소재는 대부분 친구, 가족, 선후배 관계가 빚는 갈등 같은 자신의 고민거리다. 시간이 지나 경력이 쌓여도 시각을 넓혀 창작할 엄두를 내기가 쉽지 않고, 기회도 흔치 않기 때문에 작품의 소재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창작은 고착된 형식과 내용이 반복하는 회전문을 돌리는 꼴이 되기에 십상이다. 예술가가 세계와 마주할 때 생기는 반응이 작품의 좋은 소재이긴 하지만 그것만으로 작품을 계속 만들 수는 없다. 이런 상황을 벗어난다는 명분으로 ‘다원’과 ‘융복합’ 같은 모호한 개념이 예전에 없던 기발함과 예상치 못할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작품을 요구한다. 예술가는 여기에 매달려 보지만 돌아오는 것은 별 다를 바 없는 결과와 반응뿐이다. 고갈의 정원에서 생각만으로 꽃을 피우는 일이 쉬울 리 없다.
앞서 언급한 보르헤스의 문학적 시도는 고갈의 부산 춤판에 흥미로운 의미를 던진다. 보르헤스는 모든 문학 형식이 고갈된 상태에서 옛 작품을 소환해 현대적 관점에서 재활용했다.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에서 익숙한 이 방식은 모더니즘조차 제대로 거치지 못한 부산 춤판에서는 낯선 것이다. 피나 바우슈의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푸른 수염’, 앙쥴랭 프렐조카쥬의 ‘백설 공주’·‘프레스코화’, 안은미의 ‘신 춘향’·‘바리’ 등은 신화, 전설, 문학의 텍스트를 해체한 작품으로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폭넓게 인정받고 있다. 해체란 부정적 파괴가 아니라 하나의 개념이나 해석으로의 수렴을 부정하는 것이다. 상상력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기보다 해체적 맥락을 끊임없이 만드는 힘이다.
부산 춤에도 주목할 시도가 있다. 김옥련 발레단의 ‘운수 좋은 날’은 현진건의 동명 소설을 발레로 만들었고, 지난해에 공연한 박경효·이세윤·오민욱·김평수의 ‘무궁무진 무진기행-기행문’은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을 회화·춤·미디어 등의 방식으로 해체해 다시 맥락을 만든 협업이었다. 예술이 자신의 역사를 소재로 끌어와 재맥락화하는 이런 시도는 형식과 소재의 고갈로 힘겨운 춤판에 좋은 사례가 될 만하다. 눈을 조금만 돌리면 춤 되기를 기다리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자신의 이야기만으로 작품을 만들다 보면 동어반복과 자기 복제의 덫에 번번이 갇힌다. 혼자만 끊임없이 말하는 자기도취적 작품을 즐길 관객이 과연 얼마나 될까. 춤 공연의 관객 확보가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많은 작품이 과도한 자기몰입 상태에 머물기 때문이다.
소설과 시를 춤으로 읽고, 회화와 조각·건축이 춤과 감응하고, 철학이 춤으로 이미지가 되는 장면과 마주한다면 얼마나 흥미로울지 생각해 본다. 지금이라도 메마른 춤의 정원을 적실 샘을 찾아 나서야 한다. 그리 늦지는 않았다. 춤비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