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부산메디클럽

이상헌의 부산 춤 이야기 <22> 고갈의 정원을 위한 제언

‘자기 복제’ 덫 걸린 춤꾼들이여, 소설·건축·철학을 춤으로 읽어라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9-08-26 18:38:42
  •  |   본지 17면
  • 글자 크기 
  • 글씨 크게
  • 글씨 작게
- 안무소재 친구·가족 갈등 대부분
- 형식·내용 회전문 돌듯 반복돼

- 베끼기 아닌 역사적 재해석 시도
- 소재 고갈 지역 춤판에 단비될 것

아르헨티나 소설가 보르헤스의 단편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에서 피에르 메나르(가상의 인물)는 17세기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일부를 그대로 옮겨 적는 것으로 20세기 ‘피에르 메나르의 돈키호테’를 창작한다.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을 춤으로 해석한 다원 예술 공연 ‘기행문’의 한 장면. 사진가 이인우 제공
“그는 또 다른 ‘돈키호테’를 집필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것은 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쓰려고 했던 것은 ‘돈키호테’ 그 자체였다. 그가 원작을 기계적으로 옮겨 쓰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았다는 사실을 덧붙일 필요가 없다. 그의 경탄스러운 야심은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작품과 모든 단어와 모든 행이 완전히 일치하는 몇 페이지를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소설 인용) 피에르 메나르의 작업은 ‘베끼기’가 아니라 두 작품 사이 300여 년이라는 역사적 거리로 인해 ‘다시 쓰기’가 됐다.

지금 부산의 춤은 형식과 주제의 빈곤에 처해있다. 새내기 춤꾼의 안무 소재는 대부분 친구, 가족, 선후배 관계가 빚는 갈등 같은 자신의 고민거리다. 시간이 지나 경력이 쌓여도 시각을 넓혀 창작할 엄두를 내기가 쉽지 않고, 기회도 흔치 않기 때문에 작품의 소재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창작은 고착된 형식과 내용이 반복하는 회전문을 돌리는 꼴이 되기에 십상이다. 예술가가 세계와 마주할 때 생기는 반응이 작품의 좋은 소재이긴 하지만 그것만으로 작품을 계속 만들 수는 없다. 이런 상황을 벗어난다는 명분으로 ‘다원’과 ‘융복합’ 같은 모호한 개념이 예전에 없던 기발함과 예상치 못할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작품을 요구한다. 예술가는 여기에 매달려 보지만 돌아오는 것은 별 다를 바 없는 결과와 반응뿐이다. 고갈의 정원에서 생각만으로 꽃을 피우는 일이 쉬울 리 없다.

앞서 언급한 보르헤스의 문학적 시도는 고갈의 부산 춤판에 흥미로운 의미를 던진다. 보르헤스는 모든 문학 형식이 고갈된 상태에서 옛 작품을 소환해 현대적 관점에서 재활용했다.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에서 익숙한 이 방식은 모더니즘조차 제대로 거치지 못한 부산 춤판에서는 낯선 것이다. 피나 바우슈의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푸른 수염’, 앙쥴랭 프렐조카쥬의 ‘백설 공주’·‘프레스코화’, 안은미의 ‘신 춘향’·‘바리’ 등은 신화, 전설, 문학의 텍스트를 해체한 작품으로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폭넓게 인정받고 있다. 해체란 부정적 파괴가 아니라 하나의 개념이나 해석으로의 수렴을 부정하는 것이다. 상상력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기보다 해체적 맥락을 끊임없이 만드는 힘이다.

부산 춤에도 주목할 시도가 있다. 김옥련 발레단의 ‘운수 좋은 날’은 현진건의 동명 소설을 발레로 만들었고, 지난해에 공연한 박경효·이세윤·오민욱·김평수의 ‘무궁무진 무진기행-기행문’은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을 회화·춤·미디어 등의 방식으로 해체해 다시 맥락을 만든 협업이었다. 예술이 자신의 역사를 소재로 끌어와 재맥락화하는 이런 시도는 형식과 소재의 고갈로 힘겨운 춤판에 좋은 사례가 될 만하다. 눈을 조금만 돌리면 춤 되기를 기다리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자신의 이야기만으로 작품을 만들다 보면 동어반복과 자기 복제의 덫에 번번이 갇힌다. 혼자만 끊임없이 말하는 자기도취적 작품을 즐길 관객이 과연 얼마나 될까. 춤 공연의 관객 확보가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많은 작품이 과도한 자기몰입 상태에 머물기 때문이다.

소설과 시를 춤으로 읽고, 회화와 조각·건축이 춤과 감응하고, 철학이 춤으로 이미지가 되는 장면과 마주한다면 얼마나 흥미로울지 생각해 본다. 지금이라도 메마른 춤의 정원을 적실 샘을 찾아 나서야 한다. 그리 늦지는 않았다. 춤비평가
ⓒ국제신문(www.kookj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국제신문 뉴스레터
국제신문 네이버 뉴스스탠드 구독하기
국제신문 네이버 구독하기
뭐라노 뉴스

 많이 본 뉴스RSS

  1. 1[근교산&그너머] <1485> 경북 영주 ‘무섬길’
  2. 2롯데 전설 故 최동원, 야구인 최초 ‘올해의 스포츠영웅’
  3. 3“북항돔 공모사업 목숨 걸고…” 전재수 시장 완수 의지 밝혀(종합)
  4. 4부산불꽃축제 숙박비 2배가 기본…여전한 ‘바가지’(종합)
  5. 5신천지 의혹 역풍 휩싸인 김민석…계파갈등 격화(종합)
  6. 6尹 선거법 2심도 ‘당선 무효형’…형 확정 땐 국힘 397억원 반환(종합)
  7. 7태종대 명물 다누비 사라지나…市, 대체 운송수단 검토
  8. 8조선의 궁인데…이름도 옷도 서양식 K-사극, 판타지 세계관 확장 통할까
  9. 9비스텝 원장 6개월 공석 될 판…내년 사업 어쩌나
  10. 10전재수 시정 첫 행감…국힘, 기관장 인선 등 파상공세 예고
  1. 1신천지 의혹 역풍 휩싸인 김민석…계파갈등 격화(종합)
  2. 2전재수 시정 첫 행감…국힘, 기관장 인선 등 파상공세 예고
  3. 3부울경 全 국회의원 회생촉구 서명…노동청, 지광 출석 요구
  4. 4“왜 사회적 지탄 대상 되려하나” 김대식, 지광에 회생 동의 촉구
  5. 5與 ‘조작기소특검법’ 5일 처리 추진…국힘 “모든 안건 필버”(종합)
  6. 6국힘 “미래기금, 총선용 사금고” 민주 “세수 변동 대비 안전장치”
  7. 7김민석 “신천지 與 입당 증거 없다” 사과(종합)
  8. 8국회의원 112명 서명…원내 주요 5개 정당 동참
  9. 91호기 명단 유출 파일 'MOFA(외교부) 형식, 유출 경위 파악에 주력
  10. 10국회의원 치적 ‘또’ 홍보한 김형찬 전 강서구청장 기소
  1. 1비스텝 원장 6개월 공석 될 판…내년 사업 어쩌나
  2. 2철새도래지서 즐기는 하이엔드 커피
  3. 310월 세계 선박 발주량 반토막…韓 점유율은 22% ‘존재감’
  4. 4쿠팡 Inc 올해 누적적자 2조 육박 ‘역대 최대’(종합)
  5. 5벡스코 ‘26분 정전’ 원인은 합선…노후 전력설비 개선 추진
  6. 6美 의회 장악 민주, AI 규제하나…韓 반도체 업계 촉각
  7. 7대양전기공업 배당성향 30%로…주주가치 제고
  8. 830대그룹 美 계열사 10년새 232% 급증
  9. 9고속철도 통합 이후 하루 32만 명 탑승… 전년 동기보다 12.6% ↑
  10. 10“극지연구 데이터 사업화, 기업 신성장 동력으로”
  1. 1“북항돔 공모사업 목숨 걸고…” 전재수 시장 완수 의지 밝혀(종합)
  2. 2부산불꽃축제 숙박비 2배가 기본…여전한 ‘바가지’(종합)
  3. 3尹 선거법 2심도 ‘당선 무효형’…형 확정 땐 국힘 397억원 반환(종합)
  4. 4태종대 명물 다누비 사라지나…市, 대체 운송수단 검토
  5. 5“양산 충렬사·현충시설 관리인, 10년 연속 특정인 선발 특혜”
  6. 6기장 리조트 참사 시공사 대표 중형 구형
  7. 7오늘의 날씨- 2026년 11월 5일
  8. 8“제조업 AI 전환 적극적 추진…‘부산의 심장’ 활력 되찾겠다”
  9. 9폭염에 냉방 꺼 ‘갑질 논란’ 기업, 불법 하도급 의혹 추가
  10. 10전남광주 순천대·경북 경국대 ‘지역의대’ 신설
  1. 1롯데 전설 故 최동원, 야구인 최초 ‘올해의 스포츠영웅’
  2. 2거인 4인방 APBC(아시아프로야구챔피언십) 첫 우승 이끈다…한동희·최준용 중책
  3. 3코르다, LPGA 올해의 선수상 조기 확정
  4. 4동의대 미식축구부 타이거볼 4강 진출
  5. 5레이예스 맑음…이이무라 흐림…‘로·비’ 안갯속
  6. 62027 아시안컵 내년 12월로 연기…차기 감독 선임 여유
  7. 7KLPGA 상금왕·대상 놓고 ‘림-솔(서교림·김민솔) 대전’
  8. 8MLB 애틀랜타 김하성, 퀄리파잉 오퍼 못 받아
  9. 9[뭐라노] 롯데가 스마트 야구를?
  10. 10박항서 향해 “김치맨”…태국 관중들 인종차별
우리은행
얼굴에 담긴 이야기
자연에는 길흉이 없다
시인 최원준의 음식문화 잡학사전
여수 ‘돌산 갓김치’와 갓김치 음식
궁리와 시도 [전체보기]
노동 운동부터 계엄까지…예술로 사회문제 비추다
비바람 견뎌낸 그의 회화…마침내 ‘고정관념 감옥’서 해방
김민우의 인서트 [전체보기]
비밀이 사라진 섬, 농담으로 건네는 회한
응원하고 함께하는 마음
문화레시피 [전체보기]
‘부산 커넥티드’…9.5 대 1 뚫은 신인 작가 10팀 한자리
‘부산 발레’ 낙동강 타고 새 물길 열다
박현주의 신간돋보기 [전체보기]
아이마다 다르게 자라는 이유 外
실크로드 연구자이자 간첩 ‘깐수’ 外
박현주의 책 이야기 [전체보기]
노력과 성공은 비례하는가…현대사회 씁쓸한 이면
히말라야 빙하 붕괴로 대참사…더 심각해진 기후 재난
아침의 갤러리 [전체보기]
장 마리 해슬리-Gymnopedies(짐노페디)
배미정-나무에 기대어
이 한편의 시조 [전체보기]
극락암 벚나무 /홍종원
곰 두 마리 /황인숙
주말 영화 박스오피스 [전체보기]
누적 250만 넘은 ‘치이카와’ 4주째 1위…브래드 피트 ‘하트 오브 비스트’ 2위
‘치이카와’ 3주째 정상…관객 200만 돌파 올해 열 번째 영화
오늘의 운세- [전체보기]
오늘의 운세- 2026년 11월 5일 (음 9월 26일)
오늘의 운세- 2026년 11월 4일 (음 9월 25일)
오늘의 BIFF [전체보기]
오늘의 BIFF- 2026년 10월 14일
오늘의 BIFF- 2026년 10월 13일
조해훈의 고전 속 이 문장 [전체보기]
깊어가는 가을에 밤하늘 별을 읊은 이덕무의 시
조선 중기 문신 김인후가 소쇄원 단풍을 읊은 시
  • 국제신문 골프대회
  • 맘편한 부산
  • 부산국제마라톤
  • BNK생명나눔챌린지
  • 유콘서트
걷고 싶은 부산 그린워킹 홈페이지
국제신문 대관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