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보 소통 수단 매우 적었던 때
- 사건 발생 몇 시간 만에 발행
- 독자 박철우 씨 호외 원본 기증
- 특파원 이름·혁명군 성명서 게재
- 지역 미시사 귀한 퍼즐조각 채워
한국 현대사의 결정적 분수령이 된 1961년 5·16 쿠데타 당일 부산 언론이 어떻게 대응하고 움직였는지 알려주는 귀한 사료가 발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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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철우(72) 씨가 국제신문이 1961년 5월 16일 발행한‘ 5·16 쿠데타 발생 호외’를 들고 내용과 기증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서정빈 기자 photobin@kookje.co.kr |
지난 26일 경남 김해시 소재 ㈜부흥기술단 박철우(72·부산 부산진구 범전동) 부사장이 국제신문을 방문했다. 박 부사장은 “국제신문이 창간 72주년, 복간 30주년 사업으로 시작한 ‘봉인 해제! 국제신문 사료를 찾습니다’에 동참하고자 오랜 세월 집에 보관 중이던 사료를 기증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가 내놓은 사료는 1961년 5월 16일 국제신보(국제신문의 당시 제호)가 발행한 ‘5·16 쿠데타 발생 호외’의 원본이었다. 1997년 나온 ‘국제신문 오십년사’를 확인한 결과 이날 호외를 냈다는 기록은 있으나, 호외 실물은 국제신문에 보관돼 있지 않았다.
16절지 크기의 사료는 ‘국제신보(國際新報) 호외(號外)’라는 제호 곁에 단기 4294년 5월 16일 화요일 날짜가 찍혔고 ‘서울에 ‘쿠데타’ 발생, 장면 정권 완전 전복’이라고 큰 제목을 긴박한 호흡으로 뽑았다. 첫머리에는 ‘서울서이종호특파원지급전(至急電)’, 다시 말해 ‘서울의 국제신보 특파원이 지극히 급하게 전송했다’라는 정보를 넣어 나라 상황의 화급함을 알게 했다.
기사 내용은 이렇다. “오늘(16일) 새벽 4시를 전후하여 서울에서 ‘쿠데타’가 발생했다. 서울 시내 각처에 수천 발의 총성이 울리고 장도영 중장이 지휘하는 혁명군사위원회에서 서울의 요충지를 점령하고 드디어 중앙청과 방송국 경찰을 완전 장악하고 별항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 상오 6시 대체로 시가는 평온하나 사방에서 총성이 요란히 들리고 있으며 서울역 부근에서는 더욱 심한 총성이 들리고….” 호외에는 혁명군사위의 성명서도 실었다.
이 호외를 통해 정보 소통 수단이 매우 적었던 당시, 부산 언론의 대응과 상황 인식을 볼 수 있다. 5월 16일 서울에서 터진 쿠데타 소식을 파악하고 즉각 호외에 담아 불과 몇 시간도 지나지 않은 당일 오전에 배포한 긴박함이 눈에 띈다. 5·16 쿠데타 상황이 서울뿐 아니라 부산과 전국에 빠르고 폭넓게 전파됐고, 초미의 관심사로 단박에 떠올랐음을 짐작게 해준다.
쿠데타 세력의 움직임도 확인된다. 이날 호외에는 ‘발행 겸 편집인 김형두, 인쇄인 박인주, 주필 겸 편집국장 이병주’라고 돼 있다. 편집국장으로 이날 호외 발행을 지휘한 천하의 논객 이병주 주필의 이름은 5·16 쿠데타 직후 국제신문에서 사라진다. 쿠데타 세력이 이병주 주필과 변노섭 논설위원을, 그들의 진보적인 글을 빌미로 검거해버렸기 때문이다. 이병주·변노섭 필화 사건이다. 지식인 검거 선풍도 시작됐다.
사료를 기증한 박 부사장의 사연이 지역사의 귀한 퍼즐 조각으로 등장하는 점 또한 뜻깊다. 박 부사장은 “백부 박문거 어르신은 1952~1960년 부산시의회 의원(의장 4년)을 지내셨다. 1963년 부산이 직할시로 승격할 때도 힘을 많이 보태신 것으로 안다. 선친(박문학 선생)께서 이병주 선생 등과 사귀며 시국을 논하고 술잔을 기울이시던 모습을 어릴 때 지켜봤다”고 말했다. 그는 “역사에서 배운다는 것은 여실지견(如實知見), 편견에 속박됨 없이 있는 그대로를 알고 있는 그대로 보는 것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시민과 나누고 싶어 호외를 기증하기로 했다”고 덧붙였다.
이는 작은 언론 사료에서 출발한 미시사 탐사가 지역사의 틈새를 훌륭히 메꿀 수 있음을 보여준다.
조봉권 문화전문기자 bgjo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