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형적인 배심원이라면 앉아서 이렇게 생각할 겁니다. ‘이상하네. 여자들이 비명을 안 질렀잖아. 왜 소리를 지르지 않았나요? 왜 몸싸움을 해보지 않았나요? 잘하면 빠져나올 수 있었을 텐데요.”(311쪽)

2008년 8월. 미국 워싱턴주 시애틀 임대 아파트에 홀로 살던 18세 여성 마리는 침입자에게 강간을 당했다고 신고했다. 그러나 일주일 후 마리는 거짓말이었다며 신고를 철회했고, 허위 신고죄로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3년 후 진범이 잡히면서 마리의 신고는 사실이었음이 밝혀졌다. 진술을 여러 번 강요 받는 과정에서 사소한 모순 하나에도 의심받고 취조 수준의 심문을 당하자 마리가 무너졌던 것이다. 진실이 밝혀졌지만 마리는 이미 많은 것을 잃은 후였다.

‘믿을 수 없는 강간 이야기’는 “강간 피해자가 자주 마주치는 의심의 역사를 따라가 보고 싶었다”는 저널리스트들이 방대한 자료와 인터뷰 내용으로 완성한 성폭력 범죄 수사 시스템 고발장이다. 여성에게 ‘피해자다움’을 요구하는 성차별적 사회에서 수사·재판 기관이 성폭력 피해자에게 얼마나 적대적인가를 적나라하게 들춘다. 책의 바탕이 된 동명의 르포르타주는 2016년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한국에서도 유사한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2014년 지상파 방송국 여직원의 신고가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리되면서 피해자가 역고소를 당했다 무죄를 선고받은 일화가 널리 알려져 있다. 최근에는 미투 폭로자들이 끝없는 의심과 2차 가해에 시달려 문제가 되기도 했다. 이후 이에 관한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한국 사회에 책이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중심 서사이자 연쇄 강간범을 쫓는 두 여성 형사의 수사 과정은 성폭력 사건 해결의 모범이라 할 만하다. 이들은 성범죄 피해자에게 쉽게 나타나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대한 지식이 있었고, ‘피해자다움’에 관한 함정에 빠지지 않았다. 무조건적인 신뢰와 의심 전에 경청을 우선으로 한다는 원칙도 가지고 있었다. 서로 다른 관할이었지만 범인 검거를 목표로 정보를 철저히 공유하기도 했다. 결국 작은 단서 하나로 몇 년 동안 잡지 못한 범인을 검거하는 데 성공한 그들의 사례는 성폭력 피해자를 대하는 우리의 방식을 돌아보게 만든다. 김민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