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2년 데뷔, 레코드점도 운영
- 佛학생 제의로 베스트앨범 발매
- 미국·유럽서 한 달 만에 소진
- 英 마니아는 앨범 사러 찾아와
- 신작에 재즈·록·메탈 등 뒤섞어
- 느낌을 강조한 현대음악 담아
- 드럼·꽹과리·징·기타 직접 연주
- 한국 토속적 정서·소리 알려
학창 시절 ‘핫뮤직’ 같은 음악 잡지를 공부하듯 읽고 친구들에게 아는 척하길 즐겼고 국제시장에 있던 먹통레코드에서 중고 음반을 사 모으며 음악 마니아 흉내를 냈다. 대학생 땐 방 안에 쌓인 음반들을 먹통레코드에 팔아 늘 부족했던 술값을 충당하기도 했다. 유유상종이라 어울려 다니는 친구들 역시 가능한 한 생소한 록, 메탈, 재즈, 블루스 뮤지션의 이름을 대며 서로 아는 척하기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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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년 만에 앨범을 낸 한국 아트록의 선구자 김병덕. 김병덕 제공 |
하지만 아트록이나 실험음악 쪽 얘기는 암묵적인 금기였고, 반칙이었다. 당시 우리에겐 너무 생소하고 어렵고 다른 세계의 범접할 수 없는 경지였다. 어쩌다 승부욕이 이성과 양심을 지배할 때면 해외의 마니악한 음반들을 소개해왔던 시완레코드에서 발매된 국내 음악인 1호이자, 한국의 전위적인 실험음악과 아트록의 선구자라 불리던 김병덕의 이름을 거론하며 아는 척하기도 했다. 물론 찾아 들어본 적은 없었다. 다른 세계가 몹시 궁금했지만, 그만큼 두려웠다.
지난주, 아는 형님이 가져온 전설의 현대 음악가 김병덕의 2장짜리 신작 LP ‘After Long Silence’를 두려움과 기대감 속에 처음 듣게 되었다. 지난달 29일에 발매된 이 앨범은 무려 25년 만의 신작이다. 그리고 소싯적에 뻔질나게 드나들던 먹통레코드의 대표님과 동일 인물이란 사실도 지난주 처음 알게 되었다. 부끄럽게도 말이다.
중학생 때부터 밴드 활동을 시작해 록, 국악, 전자음악, 재즈, 블루스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연주해온 김병덕은 1992년 앨범 ‘EXPERIMENT NO 2’로 데뷔했고 시완레코드에서 ‘Pot Concerto’ ‘New Trilogy’ 등 4장의 앨범을 발표하며 국내외 마니아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신작 ‘After Long Silence’ 역시 재즈, 명상음악, 록, 메탈 등 장르를 넘나들고 뒤섞으며 느낌의 중요성이 강조된 현대음악이다. 후배 뮤지션들의 도움도 있었지만 드럼, 꽹과리, 징, 건반, 기타 등 다양한 악기를 직접 연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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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앨범 ‘After Long Silence’ 커버. |
작년엔 베스트앨범 ‘EXPERIMENT NO. X’가 미국과 유럽에 발매돼 한 달 만에 소진되었다. 김병덕의 팬을 자처하는 아들뻘 되는 프랑스 학생이 찾아와 음반 재발매를 제의해 이뤄진 일이다.
몇 달 전 한국 여행 중 먹통레코드에 찾아와 김병덕의 앨범을 구매하던 영국 청년에게 “내가 이 사람이다”고 알려주자, 영국 청년은 놀란 토끼 눈으로 “당신은 런던 마니아들에게 유명하다”며 런던 공연을 제의했다. 김병덕은 “한국에서도 공연을 못 하고 있는데 런던에서 어떻게 하나? 왕복 항공권과 숙소를 제공한다면 고민해보겠다”고 대답했다. 잠깐 고민하던 영국 청년은 숙소는 자기 집이라도 괜찮은지 되물었다고 한다.
김병덕의 오랜 꿈은 바로 유럽 진출이다. 먼 이국에서 한국만의 토속적인 정서와 도의 세계를 소리로 펼치는 것이 목표다. 지구 반대편의 청년들이 계속 팬을 자처하고 나서자, 큰 자극을 받았다. 음반의 놀라운 파급효과를 실감하자, 아직 에너지가 남아 있을 때 후속타를 만들어 유럽과 미국에 ‘김병덕’이란 이름 석 자를 각인시키고 싶었다고 한다. 그것이 25년간의 긴 침묵을 끝내고 음반을 만든 이유다. 자유로운 음의 나열인 현대음악은 트로트, 댄스음악에 길든 한국의 대중에게 여전히 외면받고 있지만, 오히려 새로운 소리를 찾아 헤매던 해외의 마니아들에게 인정받고 있다.
어디든 내 음악을 알아주는 곳에서 공연하고 싶은 것이 뮤지션으로서 당연한 희망이다. 이런 자랑스러운 뮤지션을 가까이 두고 왜 그토록 오랫동안 외면해온 것인지 크게 성토하고 싶지만, 우선 알아보지 못한 나부터 부끄럽기 짝이 없다. 이제부터라도 부산이 보유한 세계적인 뮤지션 김병덕이 펼쳐온 소리의 세계에 귀를 기울이는 것으로 부끄러움을 씻어보고자 한다. 겁먹지 말고 다들 동참해주길 바란다. 작가·다큐멘터리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