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일코리안 3세 학자 정영환 박사
- 해방 후 5년간의 ‘재일조선인사’ 펴내
- 당시 신문·구술 등 사료로 논문 수록
- 권익 향상 활동위한 조직 결성 등
- 기존 자료서는 볼 수 없던 내용 눈길
1945년 8월 15일부터 1950년 6·25 한국전쟁이 터지기 전까지를 일컫는 ‘해방 공간’ 시기 일본 쓰시마(대마도)에서 ‘조선인’은 어떻게 살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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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맑은 날 부산 남항을 운항하는 자갈치 크루즈 선상에서 최근 찍은 대마도. 부산과 매우 가까운 섬이란 점을 실감할 수 있다. |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있다. 지금껏 이런 내용을 알려주는 연구나 자료는 거의 접하기 어려웠다는 사실이다. 재일코리안 3세 정영환(사회학 박사) 메이지가쿠인대학 코리아연구센터 전임연구원이 최근 펴낸 저서 ‘해방 공간의 재일조선인사’(임경화 옮김·푸른역사)에는 재일조선인(재일동포) 역사의 이 같은 ‘빈틈’을 보완해주는 드문 논문이 실려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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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마도 한국전망대 근처에 있는 조선국 역관사 조난 위령비. |
정영환 박사는 이 책에 ‘쓰시마 거류 조선인의 해방 5년사’ 논문을 수록했다. 역사학, 조선 근현대사, 재일조선인사를 연구하면서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 ‘제국의 위안부’의 반역사성’(푸른역사) 등도 저술한 그는 이 논문에서 이렇게 썼다. “해방 후의 쓰시마 조선인 역사를 주제로 한 연구는 사견에 따르면 발견되지 않는다.…근현대 쓰시마 재류(在留)조선인에 대한 역사 서술의 부재(라는 표현이 지나치다면 ‘주변화’라 해도 된다)는 중세, 근세, 근대 초기 쓰시마의 역사에 관한 연구들과 현저한 대조를 이룬다고 해도 될 것이다.” 이어 이 논문을 쓰고자 “사료로서 신문이나 조선인 단체의 의사록 그리고 구술을 사용한다”고 덧붙였다. 그 사료에는 ‘쓰시마신문’, 조선인이 발행하거나 경영한 ‘해방신문’ ‘조련중앙시보’ ‘세기신문’과 나가사키의 지역신문, 현장에서 활동한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관계자들의 기록과 구술 등이 포함된다.
논문을 보면, “1940년 국세조사에서는 6574명이던 (쓰시마의) 조선인이, 해방 후에는 2000명 전후의 수준으로 변화된 점으로 보아, 4000명 이상이 조선으로 돌아간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쓰시마신문 보도에 따르면)과거에는 조선인 해녀 ‘약 3000명을 소라잡이로 써서 6000상자를 제조’했는데, 전후에는 해녀의 감소로 큰 타격을 입었다” 등으로 돼 있다. 일제 패망과 조선 해방 이후 쓰시마에는 약 2000명에 이르는 재일조선인이 살았는데, 이들은 대부분 산속에서 숯을 굽는 일을 해 연명했다.
1946년 10~11월께 쓰시마에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련) 조직이 생기면서 쓰시마 조선인의 권익 향상 활동, 학교 설립과 문화 활동 등 교육·문화 활동을 활발히 펼친다. 이와 함께 논문은 해방 공간에서 쓰시마를 무대로 펼쳐진 조신인의 밀항 현황 등까지 상세히 담았다. 1949년에는 쓰시마에 재일조선인거류민단(민단) 조직도 생긴다. 저자는 “1960년대에는 조선인 해녀들 100명이 ‘쓰시마 조선인해녀조합’을 결성했다는 기록이 있다”며 연구 과제도 제시했다.
쓰시마는 부산에서 거리가 49.5㎞밖에 안 되는 곳이다. 넓이 709.1㎢(거제도의 약 2배)에 인구 약 3만 명의 작은 섬인데 2018년 기준 한국 관광객은 무려 41만여 명이었다. 한국, 특히 부산과 역사·문화적 인연도 깊어 부산 사람 가운데 쓰시마를 ‘쓰시마’로 부르는 이는 거의 없고 대다수가 한국식 명칭인 ‘대마도’로 칭할 만큼 친근하다. 그렇다 보니 쓰시마를 잘 안다고 여기고, 인문적 탐구의 확장에 더는 관심을 안 두기도 한다. 재일조선인 3세 학자 정영환 박사가 최근 저서에 실은 이 논문은 그런 인식에 빈틈이 꽤 있으며 관심과 탐구가 필요함을 보여준다.
조봉권 문화전문기자 bgjo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