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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영희가 만난 무대 위의 사람들 <18> 국악 지휘자 이정필

“국악 가치 전파·후원회 만들려 하루 저녁 두 번씩 사람 만나기도”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9-09-22 19:14:41
  •  |   본지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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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1 담임선생님 덕 국악고 진학
- 부산시립국악단서 13년간 활동
- 대학원 음악학과 진학 지휘 전공
- 국립부산국악원 예술감독 역임

- ‘국악, 서양음악보다 열등’은 편견
- 사람들에 ‘함께 즐기는 음악’ 설파

- “단원과 소통하며 좋은 공연 고민
- 어깨춤 절로 나오는 음악 하고파
- 예술가 서로 밀어주고 끌어줘야”

어쩌다 멀리 원주에서 외할아버지가 오셨다. 시조창과 함께 듣던 단소 소리는 산골 소년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실강(시렁의 지역말) 위에 감춰둔 악기를 까치발로 꺼내 들고 불어보니 신기하게도 어렵지 않게 소리가 났다. 단소에 불어넣은 한 번의 날숨은 긴 호흡으로 이어져 마침내 소년의 미래가 되었다. 국악 지휘자 이정필(58)의 이야기다.
국악 지휘자 이정필이 국악의 가치와 즐거움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김종진 기자 kjj1761@kookje.co.kr
“문경에서 중학교까지 다녔습니다. 초등학교 때 반주 교본을 혼자 보고 풍금도 곧잘 쳤어요. 타고난 재능이 있다 해도 농사짓는 집안이라 예술계열 진로는 꿈도 꾸지 못했죠. 그런데 중학교 1학년 담임이 이화여대를 졸업한 음악 선생님이었는데, 국악고를 잘 알고 계셨던 그분 덕분에 국립국악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됐습니다.” 그는 대금을 전공하고 부산대학교 한국음악학과를 거쳐 1988년 부산시립국악관현악단 단원으로 입단했다.

■국악, 서양음악보다 열등하지 않아

“국악단 단원이 교향악단 단원보다 적은 월급을 받고 있었습니다. 1월에 입단한 신참이었지만 불합리하다고 여겨 8월부터 농성을 시작했습니다. 거리에서 공연도 하고 부산시 관계자들을 만나 설득했죠. 결국 이 제도는 3년에 걸쳐 개선되었습니다.” 급여 차이보다 전통음악인 국악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현실을 쉽게 인정할 수 없었다. 식민지와 해방, 한국전쟁에 이르는 굴곡의 시대를 거치는 동안 우리의 인식 속에 음악이라 하면 으레 서양음악이 중심자리를 차지했다. 국악은 서양음악의 타자(他者)로 전락해 속되고 열등한 음악으로 취급되었다.

“국악단에서 13년 동안 연주자로 일했습니다. 국악인으로서의 제 자신을 좀 더 발전시키고도 싶었고 국악 발전을 위해서 뜻 있는 일을 해보자는 마음으로 지휘를 시작했습니다.” 고교 3학년 때부터 배운 지휘법과 오랜 연주 활동으로 쌓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부산청소년국악관현악단, 부산대 효원국악관현악단을 지휘했다. 더 깊이 있는 공부를 위해 중앙대 대학원 음악학과에 진학해 지휘를 전공했으며 진주시립국악관현악단 지휘자로 5년간 활동하고, 이어서 국립부산국악원 초대 예술감독으로 4년간 활동했다.

“과거에는 지휘자가 절대적인 권한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음악은 물론이고 악단 운영에서도 그랬지요.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강압적이어서는 결코 좋은 음악이 나올 수 없어요. 단원들과 소통하고 고민하면서 함께 음악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60~70명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일이 녹록하지만은 않다. 그보다 더한 어려움은 ‘국악이 질적으로 떨어지고 수준이 낮다’는 선입견이다. “재정 지원이나 사업 추진을 위해 여기저기 찾아 다녀보면 그런 시선과 마음을 그대로 느낄 때가 많습니다. 그래도 어찌합니까. 한순간에 모든 사람의 생각을 바꿀 수는 없으니 부지런하게 한 분이라도 더 만나서 설명하고 설득하는 수밖에 없었지요. 하루에 저녁을 두 번씩 먹는 날도 많았습니다.”

2015년 부산시립국악관현악단 수석지휘자로 일하는 동안에도 국악을 제대로 자리매김하려는 노력을 지속했다. “민간단체에서 활동하는 후배들은 약간의 지원금을 위해서도 처절할 정도로 노력합니다. 저는 공공 예술단 지휘자니까 더욱더 열심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양한 기획으로 객석 점유율을 높였고 후원회도 만들었습니다. 외부행사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 재정은 물론 잠재 관객을 많이 확보하려 애썼습니다.”

부산한복산업협동조합과 함께 ‘미&락 페스티벌’을 개최하기도 했다. “부산에는 영화, 음악, 무용, 연극 등 여러 축제가 있는데 전통예술축제가 없잖아요. 국비를 지원받으려면 우수한 콘텐츠와 실적이 필요합니다. 전통에 바탕을 둔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어보자는 뜻을 함께해 주신 분들 덕분에 좋은 무대를 만들 수 있었고 3년 내내 전석 매진을 기록했습니다.”

■국악은 한판 어우러져 노는 음악

세월의 흐름 속에 국악도 변화를 거듭했다. 한때는 소리가 작고 음역이 좁다며 국악기를 ‘개량’하기 바빴지만 지금은 고유의 소리를 그대로 즐길 수 있도록 공연장을 사랑방처럼 설계해서 짓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이것도 국악인가 싶을 정도의 퓨전 국악도 등장했다. 어떤 것이 전적으로 옳고 가치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국악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판의 음악이라는 데 있습니다. 관객도 무대도 없이 한판 어우러져 함께 노는 음악입니다. 우리 민족의 정서와 기질이 담긴 음악이기도 하죠. 신명과 흥을 삶에 불어넣고 어깨춤을 들썩이게 만드는 음악을 하고 싶습니다.”

그는 1981년 부산에 첫발을 디뎠다. “한 기획자가 컴퓨터를 샀는데 할부금을 못 낼 정도로 다들 가난했습니다. 그래도 좌판에 막걸리 한 사발과 과자 부스러기를 놓고 배우, 음악가, 춤꾼들이 다 함께 어울렸지요. 다들 힘들고 고단한데 그럴수록 예술가들이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면 좋겠어요. 자기 일이 아니라며 외면하거나 다른 사람의 진정성을 폄훼하면서 바짓가랑이나 잡아서는 가뜩이나 어려운 문화판이 발전할 수 없습니다.” 척박했지만 낭만이 깃든 문화 ‘판’이었다. 예술은 더불어 성장해야만 비로소 꽃피울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가 유독 더 그리운 시대다.

어떤 예술도 시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지금 우리는 ‘홀로 아름다운 예술, 사회로부터 동떨어진 예술’이 이미 그 가치를 상실한 시대를 살고 있다. 그는 서양음악의 타자가 아닌 국악 그대로의 가치를 사회에 알리는 방식으로 자신의 신념을 실천해 왔다. 올 6월부터는 경북도립국악단으로 자리를 옮겨 오랜 그 방식대로 더 친숙하게, 더 열심히 찾아다니며 국악의 가치와 즐거움을 전할 요량이다. 오늘도 저녁을 두세 번 먹는 일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공연기획자·부산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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