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너 헤어조크는 탐험가이다. ‘아귀레, 신의 분노’(1972)와 ‘피츠카랄도’(1982)에서 아마존의 정글을 헤매고, ‘퀸 오브 데저트’(2015)에선 사막의 풍광을 훑었으며, 3D 다큐멘터리 ‘잊혀진 꿈의 동굴’(2010)에선 선사시대의 흔적을 되짚곤 했다. 오지를 찾아 돌아다니던 그의 카메라는 이제 바깥을 향한 관심을 거두고 세속도시의 일상으로 들어온다. 헤어조크의 눈에는 일상의 공간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삶의 양태야말로 탐구와 모험의 대상으로 비치게 된 모양이다. ‘사이버 세상에 대한 몽상’(2016)에서 인터넷과 가상현실이 실제 삶과 현실에 미치는 영향을 탐구했던 헤어조크는 근작 ‘패밀리 로맨스’(2019)에서 일본 도쿄로 건너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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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패밀리 로맨스’ 스틸. BIFF 제공 |
영화는 주인공 이시이 유이치가 12세 소녀 마히로를 만나 요요기 공원의 벚꽃을 함께 구경하며, 자신이 오래전 곁을 떠난 아버지임을 밝히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곧이어 우리는 청구서를 내미는 행동을 통해 이시이가 마히로의 친아버지가 아니며 마히로의 어머니가 그녀를 위해 고용한 일종의 배우라는 걸 알게 된다. ‘패밀리 로맨스’는 대역을 제공하는 서비스 대행업체이며, 이시이는 고객의 요구에 따라 카멜레온처럼 정체성을 바꾼다. 철도회사 직원에게 쏟아지는 상부의 질책을 대신 받아주는가 하면, 결혼을 준비 중인 가족에게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를 대신할 대역 아버지를 제공하고, 복권 당첨이 소원인 중년 여성에게는 거짓 복권 당첨 이벤트를 열어주며, SNS 명사가 되고자 하는 여성을 위해 가짜 파파라치를 연기한다.
‘패밀리 로맨스’의 핵심은 실재와 허구 간의 기묘한 역전(逆轉)에 있다. 달콤한 허구는 실재를 압도한다. 이시이의 고객은 실제 삶에서 이루지 못하는 행복을 연극으로나마 누리기 위해 돈을 지불한다. 존재하지 않는 환상에서 삶의 만족감을 얻는 인간군상의 모습은 일말의 슬픔을 동반한다. 삶은 점점 실체감을 잃고 아스라한 허깨비가 되어간다.
로봇 호텔을 방문한 이시이는 인간의 외형을 하고 손님을 맞는 로봇 종업원과 어항 속의 로봇 물고기를 망연히 바라보면서 그것이 마치 자신과 같다고 느낀다. 인간과 물고기가 로봇으로 대체되듯 가족 또한 얼마든지 대역으로 대신하게 된 세상, 경험과 감정 그리고 관계 또한 거래의 대상이 된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진풍경을 헤어조크는 일체의 내레이션을 배제한 채 가만히 응시한다.
상냥하고 배려심 깊은 아버지를 연기하는 이시이를 두고, 마히로의 어머니는 자신이 고용한 ‘임대’ 남편과의 ‘실제’ 결혼을 꿈꾼다. 이대로 실제와 가상의 경계선은 무너지고, ‘즐거운 나의 집’의 이상은 현실이 될 것인가?
제안을 거절한 이시이는 집으로 돌아가지만 문안으로 들어서길 망설이며 밖에서 서성인다. 그리고 반투명 유리 너머로 흐릿한 어린아이의 형상이 드러난다. 이 집은 과연 이시이의 진짜 가족이 사는 집일까? 아니면 이 집 역시 ‘패밀리 로맨스’의 업무를 위한 또 다른 연극의 무대인 것일까? 가족주의의 이상과 현실의 괴리, 헛것의 작용이 실제를 움직이는 세속의 요지경을 비춘 헤어조크는 즉답을 피하고, 나머지를 관객의 판단에 맡긴다. 조재휘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