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우디아는 여섯 살 난 딸 마르게를 키우며 사는 22세의 싱글맘이다. 남자친구 주세페가 떠난 후 실연의 충격으로 망연자실해 있는 한편, 직업이 없어 생계 또한 막막한 처지다. 그녀는 자신과 같은 처지인 친구 줄리아를 꼬드겨 배우 일을 얻으려 하지만 오디션 관계로 만났던 두 남자, 알레한드로와 알베르토는 영화감독과 제작자를 사칭한 건달이다. 쇼프로그램의 출연자로 지원해보지만 줄리아가 노출을 강요하는 진행자와 청중을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가면서 방송일조차 물 건너가고, 네 남녀는 한데 뭉쳐 작은 범죄단을 꾸린다. 애완견을 훔쳐 숨긴 후, 주인에게 연락해 개를 찾아준 명목으로 사례금을 받아내는 수법을 계획한다. 집을 떠나게 된 클라우디아는 딸 마르게를 이웃집 할머니 마리아에게 맡기고 범죄 행각에 뛰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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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마르게와 엄마’ 스틸. BIFF 제공 |
모흐센 마흐말바프의 ‘마르게와 엄마’(2019)는 영화의 역사에 면면히 흐르는 두 개의 큰 강이 합류해 빚어낸 영화 같다. 교회의 가르침에 순응하지 않고 여성이 운영하는 새 교회를 열겠다는 당돌한 꼬마 숙녀 마르게와 그녀의 친구들은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1987)에서 보았음 직한 이란 차일드 시네마의 관습을 이탈리아라는 다른 배경에 옮겨다 심은 것처럼 보인다. 다른 한 축은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의 흔적이다. 무산계급의 처지로 범죄의 길을 선택하는 클라우디아와 동료들은 실업자로 전락한 인물들이 비극으로 내몰리는 ‘자전거 도둑’(1948)을 답습한다. 인생을 제대로 살아보려고 노력하지만, 실패를 겪는 여성의 수난극이란 점에서 ‘카비리아의 밤’(1957), 커플이 되어 합동으로 범행에 나서는 건 아메리칸 뉴시네마의 효시가 된 케이퍼 필름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1970)의 영향을 연상시킨다.
영화는 직업과 사랑, 정체성의 위기에 봉착한 한 여성의 시점에 따라 현재 우리 시대가 처한 몰락의 징후들을 들추어낸다. 낡아 무너져가는 건물과 노인 인구만이 남은 황량한 마을 풍경, 클라우디아와 줄리아가 일자리를 찾으면서 겪는 일련의 사건은 도시화로 인한 지역의 소멸, 유럽의 경제 위기와 여성 인권 문제, 로만 가톨릭으로 표상되는 종교적·전통적 가치의 퇴락 등 현실의 편린(片鱗)들을 예민하게 포착하고 영화 속으로 소환해낸다.
작품을 통해 현실에 대한 발언을 추구해왔던 마흐말바프의 영화적 기조는 조국 이란을 떠나 이탈리아로 무대를 옮긴 이 영화에서도 관철되고 있다. 그는 고전의 익숙한 요소들을 능란한 솜씨로 한데 엮어내면서 네오리얼리즘의 정신을 다시 현재에 재현해낸다.
만약 다큐멘터리처럼 현실을 응시하고 반영하는 데 그쳤다면 영화는 지나치게 무거워졌을 것이다. 그러나 감독은 어른들의 냉엄한 현실 반대편에 순진한 아이들의 세계, 세속의 상처 입은 이들을 보듬고 받아 줄 종교적 전통과 공동체의 자리를 마련해두는 걸 잊지 않는다. 언젠가 아이도 성장해 어른의 실패를 반복하고, 종교의 신성과 공동체의 미덕은 옛이야기가 될지 모른다. 하지만 구원은 되지 못할지언정 삶과 세계의 지난함을 버티게 해줄 최소한의 위안은 되어줄 것이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일말의 낙관이자 휴머니즘의 가능성이라고 영화는 말하고 있다. 조재휘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