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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메디클럽

남영희가 만난 무대 위의 사람들 <20> 드미트리 로카렌코프

“음색 다채로운 트럼펫은 삶 같아”… 볼쇼이 출신, 이젠 부산말 더 익숙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9-11-03 18:49:20
  •  |   본지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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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 부산시향 트럼페터 입단

- 종일 음악이 들리는 가정서 성장
- 트럼펫 여러 장르와 어울려 선택
- 경제난에 한때 택시운전대 잡아
- 공연일정 쫓겨 친형 임종 못 지켜

- “악기 연주는 잠 잘자야 하는데
- 학생들 수면 부족해 안타까워”

교향악단의 수석 주자를 ‘솔로이스트’라 부르기도 한다. 조화로운 합주를 이끌 뿐만 아니라 합주를 뚫고 나오며 음악을 빛나게 만드는 지점들을 솔로로 연주하기 때문이다. 특히 음색이 또렷하고 화려한 트럼펫은 오케스트라 전체의 색채감에도 지배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런 까닭에 교향악단들은 훌륭한 수석 트럼페터를 채용하기 위해 고심을 거듭한다.
러시아 출신 부산시향 트럼페터 드미트리 로카렌코프(오른쪽)가 아내, 아들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성효 전문기자
■오페라 전체 색감에 지배적 영향

2000년 9월, 부산시립교향악단은 러시아 트럼페터 드미트리 로카렌코프(54)를 맞아들였다. 외국인 연주자가 국내에서 활동하려면 예술흥행(E6) 비자를 받아야 한다. 고용사유서에 “한국인 트럼페터가 흔하지 않아 국내의 많은 교향악단이 외국인을 고용하고 있으니 드미트리의 영입은 음악뿐만 아니라 교육적인 면에서도 크게 기여할 수 있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현재 그는 부산지역 대학과 예술고뿐만 아니라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출강하고 있으며 서울과 밀양, 하동 등 각지에서 배우러 오는 제자들도 적지 않으니 그 기대가 틀리지 않은 셈이다.

“호흡이 무척 중요한 악기라 무엇보다 잠을 잘 자야 합니다. 그런데 한국 학생들은 너무 바쁩니다. 잠잘 시간도, 연습할 시간도 부족해 안타깝습니다.” 때마침 레슨 중인 학생이 있어 잠시 지켜보니 엄격한 사제관계가 아니라 친구처럼 친근하다. 아내 김형주 씨는 “잘잘못을 가리거나 강요하지 않고, 각자의 개성을 존중하면서 천천히 기술과 음악을 얹어준다”고 평한다. 학생들의 지친 마음을 다독이거나 연습을 뒷바라지하는 일은 아내의 몫이다. 결혼하면서 드미트리는 더는 예술흥행 비자를 발급받지 않아도 됐다.

“재능도 있지만 정말 음악이 좋아서 음악을 하는, 그야말로 좋은 음악가죠. 무슨 일이든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쿨’해서 학생뿐만 아니라 학부모들로부터 도 존경받고 인기도 적지 않아요. 가정에 조금만 더 신경을 써주면 좋겠어요.” 아내 역시 음악가다. 동요 작사가면서 피아노를 가르친다. 동요대회와 TV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남다른 성과를 내는 유능한 보컬 교육자기도 하다. 중학교 1학년인 아들 아나톨리는 지방에서 오는 학생들이 잘 곳이 없으면 방도 내어줄 만큼 의젓하다. “초등학교 다닐 때 아빠가 오셔서 연주해 주셨어요. 아빠가 특별한 사람이라 느꼈습니다. 선생님이 아빠를 안다고 하실 때면 쑥스럽기도 했지만 자랑스러웠어요. 남들과 달라서 놀림당하고 힘든 적도 많았지만 이제는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진정한 저를 알려고 노력합니다.” 음악이 싫지는 않지만 휴일이나 휴가도 없는 부모님을 보니 음악가의 삶이 힘든 것 같아 전공하고 싶지는 않단다.

■우크라이나 출신 아버지 덕분 음악인 길

드미트리가 음악가가 된 데는 우크라이나 출신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음악을 정말 좋아하셨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언제나 음악 소리가 들렸고 온종일 집에서 음악 소리가 멈추지 않았어요.”

소비에트 연방 체제였던 어린 시절에는 1937년 외젠 이자이 콩쿠르(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한 다비드 오이스트라흐가 여전히 국민적 영웅으로 칭송받고 있었고 음악에 대한 정부의 지원도 든든했다. 하지만 국가 체제가 변화하면서 음악인들의 삶 역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지금은 많이 회복되었다지만 드미트리도 연주와 택시 운전을 겸했다 한다.

부산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KBS교향악단 수석 트럼페터였던 바실리 강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으면서부터다. 볼쇼이극장 오케스트라와 모스크바심포니에서 수석 주자로 일하고 있을 때였다. “부산에 오니 100m 이내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다 구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이렇게 오래 살게 될 줄은 미처 몰랐죠.” 새로운 수석 트럼페터의 소리는 오케스트라 음색에 윤기를 더했다. “곽승 선생님이 지휘자였는데 프레이징이나 테크닉적으로 가장 어려운 곡들을 그때 죄다 연주 한 것 같아요.”

클래식 음악뿐만 아니라 재즈와 록 음악도 좋아한다. “재즈는 진정 트럼펫 음악이죠. 형식은 자유롭지만 곧바로 마음을 울리죠. 클래식은 잘 완성된 예술입니다. 특히 바흐의 음악은 음악 안에 우주와 신이 들어 있는 듯 철학적이고 깊이가 있습니다. 영원히 사랑받을 겁니다. 프란츠 훔멜 같은 현대 작곡가도 좋아합니다.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가득하죠.”

■19년간 타지 생활… “향수 깊지만 이젠 부산이 고향”

트럼펫으로 클래식, 재즈, 록 등 모든 음악이 다 가능한 까닭은 음색과 표현이 다채롭기 때문이다. 그가 트럼펫을 선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사람의 목소리와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점점 나아지기도 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나빠지기도 합니다. 그게 바로 삶이죠.” 이야기의 끝자락에 애잔한 향수를 읽을 수 있었다. 부산에 있는 동안 모스크바의 부모님을 차례로 여의었고 2016년에는 하나뿐인 형이 세상을 떠났다. 부산에서 임종했지만 그날에도 부산시향 연주가 있었기 때문에 형의 손을 스치듯 잡아주고는 공연장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바순 연주자로 음악의 동반자였던 형의 죽음은 모스크바를 떠나온 그의 유년, 청춘과의 작별이기도 했다.

“미안하고, 잘 지내길 바랍니다. 나중에 다시 만날 테니까요.” 바이칼 호수처럼 푸른 눈에 잠시 그리움이 맺혔지만 가족이 있으니 이제는 부산이 고향이라 말하며 환하게 웃는다. 아내와 아들, 그리고 유기견 2마리와 11마리나 되는 유기묘들이 그의 가족이다. 부산말은 90% 이해하지만, 서울말은 70%밖에 못 알아듣는다니 그의 고향은 부산이 틀림없는 모양이다. 오랜 세월 일터에서 함께 하며 한국말을 가르쳐주었던 고향 친구가 가만히 위로를 보낸다. 여기, 당신의 음악은 금빛 날개를 타고 날아올라 부산을 넘어 모스크바에도 부모·형제의 영혼이 깃든 천국에도 마침내 가닿을 거라고.

공연기획자·부산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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