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m 높이서 벽 타고 내려오는
- 춤꾼 15명의 아슬아슬한 줄타기
- 불안해서 더 아름다운 예술 각인
- 나아가 사회참여 의미 덧붙일땐
- 굳건한 현실의 춤으로 발전할 것
지난 3일 부산 영도구의 한 호텔 벽면을 타고 40분 동안 버티컬 댄스 ‘참을 수 없는 아름다움’(안무 김동희)이 펼쳐졌다. 척박한 노동의 흔적과 자본의 상징인 호텔이 어색하게 동거하는 곳, 치열한 삶이 무기력하게 물러난 자리에서 운명과 자본의 중력을 거스르는 듯 15명의 춤꾼이 허공에 몸을 던진다. 삶을 지탱하던 축(노동)과 땅(운명)의 중력 안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자유의지는 이 역설적 공간에서 ‘참을 수 없는 아름다움’이 되었다.
 |
| 부산 무용 단체 써드네이처가 버티컬 댄스 ‘참을 수 없는 아름다움’을 선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
버티컬 댄스(Vertical Dance)는 암벽 등반 장비를 착용하고 건축물 벽면 등 수직면을 오르내리며 퍼포먼스를 펼치는 공연 장르다. 우리에게는 생소하지만, 세계적으로는 50개 이상의 전문 단체가 활동할 정도로 잘 알려져 있다.
긴 시간 올려다보며 기다린 관객 사이에서 분홍색 풍선 꾸러미를 손에 쥔 채 걸어 나온 춤꾼이 줄을 타고 천천히 건물을 오른다. 힘겹게 올라간 춤꾼의 손에 있던 풍선이 하늘로 떠오르면 100m 건물 옥상에서 가느다란 밧줄에 의지한 춤꾼들이 내려온다. 벽을 차면서 떠오르고, 뛰어올라 허공을 걷고, 여럿이 손을 잡아 공중에서 대형을 만든다. 지상에서 지켜보는 관객의 입에서 탄성과 환호가 터진다. 관객도 마치 춤꾼과 함께 위험과 아름다움이 교차하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착각에 빠진다.
40분 동안 다양한 퍼포먼스를 펼친 춤꾼들이 땅을 밟는 순간에도 환상적인 아름다움의 여운과 감동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중력과 원심력에 반발하는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을 이용한 움직임은 짧고 위험하기에 아름다움의 강도가 더했다. 불안한 아름다움은 치명적 매력이 있다. 평상심을 흔들고 생경한 감정 상태로 몰고 가는 역동성과 불안감이 참을 수 없을 아름다움으로 각인 되었다.
버티컬 댄스는 땅을 향해 내려오는 춤이다. 허공에 몸을 던지는 것은 초월에의 열망이라기보다 현실의 갑갑함을 잠시라도 털어내기 위해서다. 그래서 버티컬 댄스는 현실을 위한 대지의 춤이다. 도로와 인근 건물 옥상을 가득 채운 관객들이 바라는 것은 줄을 타고 허공에 몸을 던지는 춤꾼들의 비상(飛翔)과 그들이 안전하게 땅을 딛는 장면이다. 자신들을 대신해 일탈의 꿈을 잠시라도 보여 준 그들의 무사 귀환을 확인하고서야 안도와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모든 것은 땅에서 시작하고 날아오르는 것은 언젠가 땅을 디딘다는 말은 부질없는 욕망을 경계하는 것이 아니라 초월하지 못할 운명을 가진 존재들을 위한 대지의 위로며 약속이다. 이런 대지의 약속이 있다면 부질없어 보이는 탈주라도 실컷 해볼 일이다. 허공에 뛰어들고서야 비로소 보이는 굳건한 대지. 구획된 일상을 가로지르는 아름다운 일탈을 꿈꿀 수 있는 것도 든든한 대지의 약속이 있어 가능하다.
부부 환경(대지)미술가 크리스토와 장 클러드는 1995년, 현재 독일 국회의사당 역할을 하는 건물 ‘라이히슈타크’를 은색 천으로 감싼 ‘포장된 라이히슈타크’를 선보였다. 독일이 통일된 지 5년 후 독일의 통합 수도로 다시 지정된 베를린에 있는 이 건물은 부부가 2주간 감쌌던 천을 풀고 리모델링하면서 투명한 독일정치의 상징이 되었다. 예술(작품)이 문화·정치적 이벤트로 확장한 사례로 지금도 회자한다.
크리스토 부부의 작품과 버티컬 댄스가 겹치면서 지금 우리 사회의 첨예한 문제를 생각한다. 만약 버티컬 댄스가 서초동 검찰청 건물 외벽에서 펼쳐진다면 어떨까. 국민 위에서 군림하던 무소불위한 권력의 상징을 박차고 날아오르는 ‘참을 수 없는 아름다움’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참을 수 없이 짜릿하다. 그렇게 된다면 버티컬 댄스는 기술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 확장에 한계가 있다는 우려를 잠재우고 대지의 춤, 굳건한 현실의 춤으로 거듭날 것이 분명하다. 춤 비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