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산연극제 연기상 수상 등 실력파 배우
- 결혼·출산·생활고에도 무대 누볐지만
- 10년전 떠나 제주도서 연극교육자 활동
- 연습 따라다녔던 딸, 문화연구자 성장
임해련(59). 부산에서 활동한 중견 배우다. 지금은 이름조차 아련한 극단 ‘처용’과 ‘세이’, 그리고 부산시립극단에서 여러 배역으로 관객들과 마주했다. 강인하면서도 인정스러운 해녀로 부산의 이미지를 드러낸 광고에도 출연했는데 홀연 무대를 떠났다. 제주에 살고 있다는데 만남이 쉽지 않았다. 수개월 간 설득 끝에 겨우 인터뷰를 허락했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을 뭐할라고. 부산을 떠난 지 벌써 10년입니다. 부산에서 꾸준히 활동하는 좋은 배우들도 많은데 새삼스럽게…”
 |
| 부산에서 활동했던 중견 연극배우 임해련 씨가 10년째 살고 있는 제주의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임해련 씨 제공 |
자신을 한없이 낮추지만 1984년 ‘신모의 섬’으로 부산연극제에서 여자연기상을 받았으며 제15회 부산연극제 대상작 ‘그 여자의 숲속에는 올빼미가 산다’(1997)에 출연했던 실력파 배우다. 대학 연극동아리에서 활동했는데 더없이 즐거웠단다. 몇몇 대학의 졸업생들이 연합하여 극단 ‘장터’를 만들어 활동을 이어갔다. 김동석, 이돈희, 이종근이 당시 함께 한 이들이다. 두 작품을 상연하고 세 번째 작품을 연습하던 도중 해체되고 말았다. 그 시절 대부분의 극단이 그랬듯 운영난 때문이었다.
■결혼 출산 임신도 꺾지 못한 열정
 |
| 부산시립극단에서 고전 대작 ‘파우스트’를 공연하던 당시의 배우 임해련. |
“뭐가 그렇게 좋았는지 저도 모르겠어요. 연기도 좋았지만 포스터를 붙이러 뛰어다녔던 일, 관객을 맞이하던 일까지 어느 하나 즐겁지 않은 일이 없었지요. 여덟 살 위 큰오빠는 ‘가시나가 딴따라 짓 한다’며 대본을 숨기기도 했지만 내가 즐거우면 꼭 해보려는 의지가 강한 편이었습니다.” 결혼과 임신, 출산조차 그런 열정과 의지를 쉽사리 꺾지 못했다. ‘처용’에서 ‘햄릿’을 준비하던 때다. 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없어 배우들이 집으로 와서 연습했다. 아이를 품에 안고 연습했고 공연 때는 시부모님이 극장 로비에서 아이를 봐주시기도 했다. 그러나 네 살배기 아이를 잃어버린 일을 겪고 나서 미련 없이 연극을 접었다. “생활 때문에 가게를 운영했어요. 도매시장에서 물품을 사는 사이 아이가 없어진 거예요. 혼비백산해 있는데 창선파출소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울다 지쳐서 잠든 모습을 보니 욕심껏 활동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다시 시작하게 됐죠.”
그 작품이 바로 극단 ‘세이’의 ‘그 여자의 숲속에는 올빼미가 산다’다. “세이는 최시영 선생님이 광안리에 마련한 소극장입니다. 당시에는 극장 사정 때문에 아무리 좋은 작품도 길어야 고작 2, 3일이면 막을 내려야 했어요. 무척 아쉬웠지요. 최 선생님이 걱정 마라 극장 하나 만들마 하시더니 정말로 사재를 털어 극장을 열었어요. 연출자 허영길 선생님 공도 큽니다.”
그즈음인 1998년 부산시립극단이 창단됐다. “부산 배우들의 자질이 아주 우수합니다. 소리의 파워가 다른 지역과는 확연히 차이가 나죠. 창단 당시 연령대별로 배우를 선발했던 것 같아요. 제 나이 위로는 여성 배우가 별로 없었으니 연기를 잘해서라기보다는 나이 덕을 본 셈이죠.” 부산시립극단은 시립예술단 가운데 가장 늦게 설립됐으며, 다른 시·도립극단과 비교해도 늦은 편이었다. “다들 열정을 쏟아부었지요.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았다고나 할까. 대사가 모두 경상도 사투리였던 창단작품 ‘자갈치’를 비롯하여 고전 대작 ‘리어왕’과 ‘파우스트’, 그 외에 현대극, 부조리극, 악극 등 다양한 작품을 했어요.”
정단원 수가 적어 객원 단원들이 많이 동원되었다. 그 시절 객원배우나 공연 뒤풀이에 함께 했던 관객들은 후배들을 잘 챙기는 그의 모습을 기억했다. 오래된 그 이야기를 전하자 쑥스러워했다. “오지랖이라 욕이나 하지 않았을까 몰라. 낯선 곳에 가면 누군가 손을 내밀어주는 것만 해도 고맙잖아요. 저도 제주에서 그런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극단에선 배우, 밤에는 대리운전 기사
개인적으로는 생계든 마음자리든 편치 않은 시절이었다. 극단에서는 배우로 밤에는 대리운전 기사로 일했으며, 그리고 짬짬이 절에서 공부하는 삶을 살았다. 연극보다 더 연극 같은 나날들이었다. 결코 고단하지 않았다. 배우가 되지 않았더라면 부처님 제자가 되었을 것이라는데 마음공부의 힘이었을까.
부산시립극단을 떠나 시작한 일이 연극교육이다. “배우로만 살았다면 오직 내 작품, 내 배역, 내 몸 훈련에만 몰두했을 겁니다.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오히려 제가 더 많이 배웠습니다.” 특별히 강조하는 점은 시선이다. 서로 친한 듯 보여도 막상 함께 무대에 오르면 어색한 시선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무엇이든 혼자 하는 시대잖아요. 소통은 언제 어디서 누구와 어떤 방법으로 할 수 있을까요. 연극교육의 목적은 작품이라는 결과물이 아니라 소통의 과정을 경험하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딸과 함께 하는 2인극 꿈꿔
최근에는 가까운 연극강사들과 대본 읽기 모임을 하고 있다. “무대를 떠났어도 늘 마음 한쪽에는 무대가 있죠. 연극, 대본, 무대라는 단어만 들어도 그립습니다.” 채 마치지 못한 숙제도 있다. 허영길이 작고하기 2년 전 이강백의 모노드라마 대본을 보냈다. 스태프들이 쓸 수량까지 일곱 권이나 살뜰히 챙겨주셨건만 아직 무대에 올리지 못했다. 젖먹이 때부터 연습을 함께 했던 딸은 어느덧 문화연구자로 성장했다. 딸과 함께 하는 2인극 무대도 꿈꾼다. 딸과 자신에게 건네는 따뜻한 위로다.
“옛말에 가다가 그만두면 아니 간 것만 못하다지만 아닙니다. 간 만큼 얻는 것이 있어요. 무대를 떠날 때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겠지요. 하지만 무대를 살았던 그 시절, 그 경험이 지금, 또 내일을 살아가는 밑거름이 되더군요. 하고 싶은 일, 호기심이 동하는 일이 있다면 꼭 해 보길 바랍니다. 어디쯤에서 그만둔다고 해서 실패한 것은 아니랍니다.” 절로 지난 시간을 돌아보게 되는 이즈음, 후배들에게 들려주는 그의 조언은 명작 대사 같다. 무대가 어디 정해진 틀이랴. 당신의 이름은 언제나 ‘배우 임해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