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인 언어로 소통되는 음악
- 연주자는 과거 악상 집착 말고
- 작곡가 말하고자 한 의도 바탕
- 예술적 상상력 더해 감동 줘야
현대인은 다양한 환경에서 여러 형태로 살아간다. 다양한 환경이란 것을 조금 다르게 살피면 해결해야 할 일 또한 많은 것이 된다. 이들 다양한 문제를 풀어내는 방법 또한 수없이 많다. 예술도 그 다양한 방법의 한 범주로 들어간다. 특히, 음악은 전문가부터 애호가까지 매우 다양한 사람이 즐긴다. 모두가 바라는 음악가의 초상(肖像)은 어떤 모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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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전당에서 올해 열린 마티네 콘서트(낮에 하는 음악회) 장면. |
음악은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예술의 한 장르이다. 한병철은 그의 책 ‘아름다움의 구원’에서 “미는 망설이는 자이며 늦둥이다. 미는 순간적인 광휘가 아니라 나중에야 나타나는 고요한 빛이다”라고 역설했다. 필자는 여기서 음악이 가져야 하는 힘을 발견했다. 왜 ‘나중에 나타나는 빛’인가? 우선 음악은 흐르는 시간성 위에서 진행되는 시간예술이다. 결국 순간에 표현되어야 하는 것이다. 순간이라는 광활한 개념을 현시점으로 잡고 음악가는 모든 예술적 상상력을 소리로 표현해야 한다. 그럼, 무엇을 표현할 것인가?
연주가는 과거 작곡가가 작곡한 곡이든, 동시대 작곡가의 곡이든 ‘작곡가의 작곡 의도’를 파악해야 한다. 이를 위해, 작곡된 시대를 더욱더 폭넓고 체계적인 연구를 통해 사회사·문화사적으로 분석해야 한다. 이런 바탕 위에 연주자는 상상력을 발휘해 새롭게 해석한다. 가끔 작곡가의 작곡 의도만으로 연주·해석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여기에 연주자 몫이 겹쳐 연주자의 새로운 해석으로 연주는 실현된다. 삶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형태가 다른 다양한 사람의 무리 속에서 ‘단 하나의 해석’으로는 감동을 줄 수 없다.
결국, 연주자의 해석에는 연주자의 삶이 투영돼야 한다. 동시대 사람들에게, 연주자의 삶을, 무대 위에서, 연주자의 의도로 재해석해, 들려주어야 한다. 과거의 빠르기와 지금의 빠르기는 상당히 차이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과거의 강약과 지금의 강약이 세월의 흐름만큼 동떨어져 있음을 들려줘야 한다. 이런 모든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과거 악상에만 사로잡혀선 안 된다. 물론, ‘정격 연주’라는 이름으로 작곡 당시 형태대로 철저하게 연주하는 영역이 있다. 논의가 너무 넓어지므로 이 글에서는 일단 논외로 한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연주자는 과거에 대한 철저한 연구·분석을 토대로 본인의 예술적 상상력을 불어 넣어 현실적으로 실현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상상력이 예술의 힘이다. 이 힘이 감상자에게 위로와 위안을 준다. 거기 음악의 안식이 있다.
현대는 소통(疏通)을 원하면서도 소비(消費)만을 촉진하는 형태로 음악이 발달하는 것 같다. 이는 예술의 상상력을 축소할 뿐 아니라 시간이라는 한시성 위에서 한탕주의로 흐르는 경향도 아주 강하다. 예술이 “나중에 나타나야 하는 고요한 빛”이 되기 위해서는 한탕주의가 아니라 지속하는 시간의 흐름 위에 음악이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현대인이 음악에서 위로와 위안을 받는 것은 그냥 ‘잘 만들어 낸 소리’만을 통해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음악은 많은 고뇌의 산물이며, 세계인의 언어로 소통된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는 소리를 내기에, 소리 자체에 ‘자신을 대변하는 힘’이 있다. 인간이 모든 소리를 듣지 못할 수 있지만, 모든 생명체는 소리를 낸다. 음악은 이 소리를 새롭게 분석·해석해 악보라는 암호 속에 상상력을 담아 표현한다. 생명의 소리에 세계인이 열광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소리라는 매개체를 통해 세계인은 소비가 아닌 소통하는 것이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음악가의 초상에 대한 필자의 답은 명확하다. 더불어 사는 이 시대에, 음악이 ‘나중에 나타나는 고요한 빛’이 되고, 사람들에게 위로와 위안을 줄 수 있도록, 사유하고 상상력을 발휘하고 노력해야 한다. 이와 같은 목적 말고 다른 것은 음악인 스스로 내려놓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시립예술단체를 비롯한 음악단체·음악인 모두 마찬가지다. 이 시점이 이를수록 시민과 애호가의 지지를 받는 시점도 빨리 올 것이다.
문화유목민·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