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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 ON <상> 외로움과 치유가 화두로

내 아픔을 빚어, 상실·갈등의 시대 상처 어루만지다

  • 국제신문
  • 권용휘 기자 real@kookje.co.kr
  •  |  입력 : 2019-12-31 22:30:23
  •  |  본지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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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성빈 ‘심연에서 우리 서로’展
- 형 떠나고 목장일 떠맡으면서
- 고립감·상실감 작품으로 승화
- 관찰자 시선으로 응어리 풀어내

- 조국 의혹·검경 수사권 조정 등
- 사회가 대립할수록 치유 갈망
- 작가 수행 느낄 수 있는 단색화
- 오랜 시간 인기 작품군인 이유

- 출판계도 올해 ‘외로움’에 주목
- 작년 베스트셀러 유행 이어져
- 위로·치유법 소개 책 봇물 예상

지난달 28일 부산 해운대구 아트소향에서 열린 감성빈 작가 개인전 ‘심연에서 우리 서로’를 찾았다. 작품 주제는 슬픔과 치유. 호평은 이어지고 있다. 부산의 최대 아트 페어인 ‘아트부산 2018’에 내놓은 작품을 모두 판매하는 등 그는 ‘완판 작가’로 꼽힌다. 달라진 나와 주변 환경, ‘나를 떠난 너’를 받아들인 작가의 작품에는 ‘치유’가 스며 있다. 어떤 상처와 좌절이 있었기에 그가 치유에 몰입하는지, 그 과정에서 그는 어떤 치유를 체험했는지 육성으로 들어보았다.
부산 해운대구 아트소향 전시장에서 만난 감성빈 작가가 상처를 치유한 경험에 대해 말하고 있다. 김종진 기자
■감성빈 작가의 육성 회상

2012년 말이었을 것이다. 밤이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신나게 어딘가로 달려가고 있었다. 한순간 몸이 붕 떠올랐다. 영화 속 ‘이티’처럼. 구급차 소리가 들렸고 오토바이 부품이 이리저리 나뒹굴었다. 정신을 잃었다. 오토바이 앞바퀴가 맨홀 구멍에 걸려서 난 사고였다. 몸은 만신창이가 됐고, 얼굴 반이 함몰됐다. 그곳은 중국이었다. 어느 병원에 가도 외국인 유학생을 수술하겠다고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귀국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한국에서 수술은 무사히 마쳤다. 중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형이 죽었다.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2살 터울이던 형은 우상과도 같은 존재였다. 착하고 공부도 잘하고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했다. 형이 농대를 졸업한 것도 가족 목장을 경영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가족도 모두 형에게 의지했다. 내가 미대를 간 것도 그림을 잘 그리는 형을 닮기 위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영안실에서, 죽은 형을 확인하고는 바로 목장으로 가야만 했다. 소에게 밥을 먹일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목장에 몸이 묶였고 중국으로 갈 길은 막혔다. 미술 작업을 더는 할 수 없다는 현실은 슬픔이 아닌 분노에 휩싸이게 했다. 나는 중국 베이징에서 어느 정도 주목받는 신진 작가였다. 2006년 대학 과정인 중국 베이징 중앙미술학원 조소과에 외국인 학생 중 1등으로 입학했고, 중국 전국대학생조각대회에서 우수작품상을 비롯해 각종 상을 받았다. 중국 작업실을 정리할 수밖에 없었고, 7년 동안 중국에서 한 작업은 휴대전화 속 몇 장 사진으로만 남게 됐다. 그토록 원했던 미술을 포기했고, 그렇게 싫어했던 목장을 떠맡았다. 지금 떠올려 보면 지옥 속에서 산 것 같다. 1년이 지나고 목장 일이 손에 익으니 화가 치밀었다. 가족과 다툼도 잦아졌다.

살려면 미술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벽돌을 사서 축사 옆에 작업실을 지었다. 소를 돌봐가면서 하루 10시간 넘게 미술 작업을 했다. 작품 스타일은 달라졌다. 중국에서는 지문과 눈동자까지 표현하는 극사실주의 조각을 했다. 섬세함과 집중력이 필요했고 시간이 많이 들었다. 한국에 돌아온 뒤로 분을 풀어야 했던 내게는 전혀 맞지 않는 작업이었다. 균형·비례를 중시하던 작업관이 뒤집혔다. 짧은 시간에 감정 덩어리를 풀어냈다. 혼자 고뇌하고 비명 지르며 슬픔을 직접 표현했다. 나와 내 가족 모습이었다.

그런데 작품 속 주인공 모습이 점점 바뀌어 갔다. 서로 끌어안거나 어루만지거나 울면서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하고 있었다. 작품을 만들면서 관찰자 입장에서 슬픔을 바라봤다. 심연에 빠져있을 때의 고립감, 누군가를 잃어버린 그 기분을 알게 됐다. 그렇게 가슴속 응어리가 풀어지기 시작했다. 전시를 하게 됐고 사람들을 만나자 조금씩 스스로 치유하게 됐다.

형을 잃은 내 슬픔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작품 속 주인공을 보면 지금은 슬픔 속에서 돌아 나온 것 같다. 슬픈 사람들이 모여 고립감을 함께 느끼는 것만 한 위로가 없다. 올해는 서울 명동성당 지하 광장에서 개인전을 열기로 했다. 성경에 나오는 치유 장면을 재해석한 작품을 준비 중이다. 내가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하는 이유는 단 하나. 내 작품을 본 사람들이 슬픈 감정을 끄집어내고 공감하면서 치유되는 것이다.(‘회상’ 끝)

■예술이 사람을 끌어안는 법

서울 서초동에서 열린 ‘정경심 교수 기각 촉구 촛불집회’. 국제신문 DB
감 작가의 회상은 상처와 좌절을 직시하게 한다. 지난해 한국 사회는 너무 많은 갈등과 아픔을 겪었다. 조국 전 장관을 둘러싼 의혹과 논란, 검경 수사권 조정 갈등, 여야 간 선거법 개정 갈등, 한일 갈등 그리고 수많은 사회 현장의 충돌과 개인의 아픔. 다종다양하고 격렬한 갈등이 각자 마음에 상처와 좌절을 고스란히 남겼다. 상처와 좌절에는 치유가 필요하다. 그냥 두면 곪는다. 2020년의 중요한 개인·사회적 관심사로 ‘치유’를 제안하는 이유다.

갈등으로 입은 상처를 또 다른 갈등으로 덮는 방법은 파멸로 향하는 급행 열차표를 뽑는 일일뿐이다. 격렬하고 적대적인 갈등과 거기에서 비롯된 상처·좌절을 그대로 두면 ‘나와 다른 너’를 영영 받아들이지 못하고 사람들은 쪼개진다. 쪼개져서 외롭고, 그렇게 쌓인 외로움은 자신을 좀먹는다. 위에 소개한 감성빈 작가가 목장에 남겨진 채, ‘새로운 미술 작업’이라는 출구를 찾지 못했을 때 스스로 피폐해져 간 것이 그 사례다.

갈등이 치열해질수록 치유를 갈망하는 욕구는 강해진다. 이 때문일까? 미술계에서는 ‘치유’가 화두로 떠오른 지 오래다. 요즘은 인기가 예전만 못하지만, 여전히 한국 현대화 중 최고 인기 작품군이라 할 ‘단색화’의 주요 주제는 ‘치유’다. 캔버스에 물감을 30겹에서 많게는 70겹까지 덧칠한 후 반복해서 칼로 긁어내는 행위. 숯덩이 위에 한지를 겹겹이 쌓고 쇠솔로 두드리고 긁어내는 행위. 신문지를 캔버스로 삼아 볼펜과 연필로 수없이 긋고 지우기를 반복해 목탄 같은 먹지를 만들어 내는 행위. 수를 놓고 긁고 자르고 붙이고 쌓는 작업이 반복된다.

관람객은 그림을 통해 작가의 수행을 엿보면서 마음이 치유되는 체험을 한다. 감성빈 작가는 “작품을 만들면서 관찰자 입장에서 슬픔을 바라봤다”고 했다. 매우 중요한 단계이자 방식이다. 그러면서 자신의 고립감과 상실감을 직시하게 됐고, 응어리가 풀리기 시작했으며, 전시를 하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치유를 체험했다고 했다. 예술이 치유하는 방식이 거기 있다.

■치유에 관한 관심 더 커질 것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문재인 하야 범국민투쟁 대회’ 모습. 국제신문 DB
이는 미술에 국한되지 않는다.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 출판계는 ‘외로움’과 ‘치유’를 주목한다. 1인가구가 늘어남에 따라 외로운 사람들을 위한 도서가 유행할 것으로 보고 올해 주목받을 열쇠 말로 ‘외로움’을 꼽았다. 올해 트렌드를 분석한 책들 역시 ‘외로움’을 꼽았다.

그러면서 외로움을 다루거나 공허를 ‘치유’하는 방법에 관한 모색이 뒤따른다. 지난해 말 베스트셀러 목록 상위권에는 외로움을 위로하거나 다루는 ‘치유’ 방법을 소개한 책이 많다. 지난해 10월에 출간된 베스트셀러 ‘지금 이대로 좋다’(법륜 스님 지음) 역시 주제는 외로움과 치유다. 스님은 “외로움은 내가 마음의 문을 닫고 세상과 상대를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고 “마음의 문을 닫으면 수많은 사람과 함께 있어도 외로워지는 것. 외롭다는 것은 대낮에 눈을 감고 어둡다고 불 켜라고 외치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지난해 9월에 나온 수필집 ‘지쳤거나 좋아하는 게 없거나’(글배우 지음)도 베스트셀러가 됐다. ‘마음이 외롭고 공허해지는 순간’ 등 외로움을 주제로 일종의 치유법을 다루는 글을 많이 담았다. 새해에는 외로움이나 상처를 응시하는 것을 넘어 서로 달래고 스스로 힘을 찾도록 도와주는 책이 더 많이 나올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며, 치유는 손길을 뻗어오는 사람에게 먼저 찾아간다.

권용휘 기자 real@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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