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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식의 '철학 기행' <1> 동학, 인본주의 혁명

사람이 하늘이요, 내가 우리요… ‘용담정’서 시작된 계급타파 정신

논설위원이 여는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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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많지만, 쓸 만한 말은 드물다. ‘내로남불’의 위선과 허위가 판치는 까닭이다. 그럴수록 말다운 말, 사상다운 사상에 대한 갈증은 커진다. 고단한 현실을 위로하고, 불안한 미래에 한 줄기 빛을 비춰줄 수 있는 정신의 등불 말이다. 그런 철학을 찾아 기행을 떠난다.


- 신분제로 고통받던 19세기 조선
- 수운 최제우가 백성 구제 위해
- 고향 경주의 정자 ‘용담정’ 찾아
- 인간 공경 위한 사상 기틀 정립

- 굽이쳐 흐르는 계류의 기상 비범
- 정자 풍광은 마치 ‘용틀임’ 연상

- 최, ‘인내천’ 범신론 세계관 구축
- 민중과 함께 인본주의 혁명 나서
- 여종을 딸 삼아 신분 철폐 실천도
- 최시형·손병희가 가르침 받들어

- 고위험·저임금 하청 비정규직 등
- 현대판 신분제 횡행하는 현실
- 동학 사상은 여전히 큰 울림으로

‘시아버지 상에 이미 상복 입었고 애는 아직 배냇물도 안 말랐는데/할아버지·아들·손자 삼대가 다 군적에 실리다니/급하게 가서 호소해도 문지기는 호랑이요/향관은 으르렁대며 외양간 소 몰아가네/남편 칼을 갈아 방에 들자 자리에는 피가 가득/자식 낳아 군액당했다고 한스러워 그랬다네’.

   
용담정 아래서 올려다본 구미산 계곡. 산 들머리에서 용담정까지 1㎞ 남짓 굽이치는 계곡의 풍광이 자못 수려하다. 최제우는 이곳에서 동학 사상을 확립했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의 ‘애절양(哀絶陽)’ 시구로 글문을 연다. 동학(東學)의 탄생 배경이 된 조선 말기의 비인간적 사회상을 이만큼 절절하게 담아낸 증언이 없어서다. 태어난 지 사흘 된 아이를 군적에 올린 관리는 항의하는 백성의 소마저 수탈했다. 이에 절망한 피해자는 “이것 때문에 이런 곤액을 받는다”며 자신의 생식기를 잘라버렸다는 이야기다. 누릴 권리는 양반이 독점하고, 군역과 납세 등 의무는 상민에게 떠넘기는 계급사회의 비극이다.

이 시가 나온 지 200여 년이 지난 오늘날은 어떤가. ‘애절양’의 참상은 옛일이 됐을까. ‘현대판 신분제’로 불리는 비정규직의 실태는 부정적인 답을 내놓는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에 따르면 지난해 비정규직 노동자는 856만 명으로 전체 노동자(2005만 명)의 41.6%에 이른다. 2018년보다 35만 명(0.7%포인트) 증가했다. 비정규직의 임금은 정규직의 51.8%에 불과하다. 하청업체 비정규직의 사정은 더 심각하다. 원청업체 정규직이 꺼리는 위험한 작업을 떠맡아 하다 죽기 일쑤여서다.

2014~2018년 5개 발전 공기업에서 발생한 산재 사망자 21명 모두가 하청 비정규직이었다. 국내 전체적으로는 하루 평균 1명의 하청 비정규직이 산재로 숨진다. 최근 정부가 대책을 마련했지만, 죽음을 외주화하는 야만적 노동구조는 그대로다. 정규직의 절반밖에 안 되는 임금을 받고 대신 죽어가니, “조선 시대 양반·상놈 신분제 같다”는 절규가 절로 나온다. 헌법에는 자유·평등·민주·인권을 보장한다고 명시돼 있지만, ‘자본이 주인(자본주의)’ 노릇을 하는 물신(物神)적 현실에선 부자유·불평등·비민주·비인권이 횡행한다.

■한울님 모시기

   
용담정 초입에 있는 최제우 동상.
동학은 19세기 조선 민중에게 유일한 희망의 동아줄이었다. “주막집 아낙네도 산골 초동도 동학 주문을 외지 않는 이가 없었다.” 동학 사상의 전파에 나선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1824~1864)를 체포한 선전관 정운구가 왕에게 보낸 보고서만 봐도 이를 알 수 있다. 사람의 가치가 땅바닥에 떨어진 상황에서 “사람이 곧 하늘(人乃天·인내천)”이라며 양반·상민 차별없이 모든 사람을 하늘로 받들었으니 어찌 그러지 않겠는가. 사람을 이처럼 공경한 건 세계사상사에서 전무하다. ‘비정규직 신분제’가 엄존하는 21세기 한국에서도 동학 사상은 여전히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철학 기행’의 첫 주제를 동학으로 설정한 이유다.

지난해 말, 동학의 사상적 기원을 찾아 수운의 고향인 경북 경주 현곡면 가정리로 갔다. 그곳에는 수운의 생가와 묘소, 그리고 그가 자신의 이름대로 ‘어리석은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 사색하고 수련했던 용담정(龍潭亭)이 있다. 용담정의 풍광은 수운의 사상을 닮았다. 해발 594m의 구미산 중턱에 자리한 정자는 60년의 복원 연륜이 쌓여 고졸한 아름다움을 자아냈다. 산 아래 진입로에서 정자까지 1㎞ 남짓한 산길 옆으로 굽이쳐 흘러내리는 계류의 기상은 자못 비범했다. ‘용틀임’이 연상됐다. 사람이 하늘 되는 ‘다시 개벽(혁명을 뜻하는 수운의 용어)’ 세상을 향한 용틀임 말이다.

1860년 용담정에서 자신의 사상을 확립한 수운은 1년 후 민중에게 전파하기 시작했다. 수운 사상의 핵심은 ‘시천주(侍天主)’다. ‘한울님(하느님을 지칭하는 동학의 용어)을 모신다’는 뜻이다. 한울님은 초월적 창조주가 아니다. 수운은 하늘을 ‘사람 안의 신령(內有神靈·내유신령)’과 ‘사람 밖의 기화(外有氣化·외유기화)’라고 했다. 신령은 영혼 혹은 정신이다. 기는 세계를 구성하는 근원 또는 재료, 기화는 기가 만물을 산출하고 변화시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하늘은 정신과 물질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우주적 생명체계, 즉 ‘스스로 그러한’ 자연(自然)이다. 하늘(자연)을 높여 부른 게 한울님이다. 그런 한울님을 사람이 자기 안에 모신다고 했으니, 사람이 곧 하늘인 셈이다. 사람·하늘·자연을 동격으로 보는 범신론적 세계관으로, 인본주의의 지극한 경지를 보여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늘(사람)을 모시는 방법이다. 수운은 그 방법을 ‘옮기지 않는 것(不移者·불이자)’이라고 했다. 옮기지 않는다는 건 변하지 않고, 떠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을 하늘처럼 존중하는 신념을 변함없이 실천하겠다는, 민중을 떠나지 않고 민중과 함께 ‘다시 개벽’ 세상을 건설하겠다는 의지의 표출이다. 실제 수운은 자신의 여종들을 수양딸과 며느리로 삼음으로써 신분제 철폐를 실천했다. 또 조정이 “세상을 헷갈리게 하고 어지럽혔다”며 참형에 처할 때까지 민중을 떠나지 않았다. 수운은 앎과 삶이 일치하는(知行合一·지행합일) ‘불이자’였다. 그의 사상에서 자유·평등·민주·인권 의식이 깃든 자생적 근대화의 맹아를 본다. 우리 민족사에서 최초로 계급 타파를 천명한 ‘인본주의 혁명’이었다.

   
최제우의 생가가 있는 경북 경주시 현곡면 가정리.
■사람과 하늘은 동격

용담정에서 2㎞가량 떨어진 수운의 고향 마을에는 불타버린 그의 생가가 복원돼 있다. 마을 앞 구미산 능선에 자리한 수운의 묘소에 들렀다 내려오면서 본 그의 고향 마을은 평화로웠다. 마을은 푸른 하늘을 받들어 모시고, 하늘은 마을을 어루만지듯 품고 있었다. 하늘과 사람이 하나로 통일(天人合一·천인합일)된 모습이었다. “수운대신사께서 신분제 철폐를 주장하신 건 1861년으로, 미국의 노예해방보다 4년 빠릅니다.” 생가 관리소에서 일하는 수운의 후손 최현찬(64) 씨의 선조에 대한 자긍심은 대단했다. 대구에서 공무원으로 일하다 퇴직했다는 그는 “남은 삶을 동학 연구에 바칠 계획”이라고 했다. 동학의 인본주의 정신은 그렇게 연면히 이어지고 있었다.

동학의 2세 교조인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1827~1898)은 “사람이 하늘(人是天·인시천)이니, 사람을 하늘처럼 섬기라(事人如天·사인여천)”고 했다. 베 짜는 여인을 보곤 “한울님이 베를 짠다”고 했고, “아이를 때리는 것은 한울님을 때리는 것”이라며 구타를 일절 금하기도 했다. 여인과 아이도 한울님을 모신 존재이니, 하늘처럼 섬겨야 한다는 주장이다. 반상의 차별은 물론 남녀·노소 차별까지 없애고자 한 것이다. 영국과 미국, 프랑스 등 서구 나라들이 1918년 이후에야 여성에게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부여하며 법적 남녀평등을 이룬 것과 견주어 보면 그 선진성이 두드러진다.

해월은 하늘과 사람에 이어 사물을 공경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경천(敬天)·경인(敬人)·경물(敬物) ‘삼경’이다. 아울러 ‘만물과 만사가 하늘(物物天事事天·물물천사사천)’이라고도 했다. 이 대목에선 현대의 생태론적 세계관도 보인다. 자연을 정복 대상으로, 인간과 자연을 대립관계로 파악한 서구 근대문명의 한계를 동학은 19세기가 가기 전에 이미 사상적으로 극복한 셈이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파리기후변화협약을 탈퇴한 건 미국과 트럼프 정권만의 문제가 아니다. 서구 근대문명의 한계를 드러낸 상징적 사건이다.

해월은 그 세계관을 바탕으로 도저한 인본주의 사상을 펼쳤다. “제사를 받들 때 벽을 향해 신위를 베푸는 것이 옳으냐, 나를 향해 베푸는 것이 옳으냐?” 해월은 1897년 동학 3세 교조인 의암(義菴) 손병희(孫秉熙·1861~1922)에게 물었다. 의암은 “자신을 향해 베푸는 게 옳다”고 답했다. 이른바 ‘향아설위(向我說位)’다. ‘향아설위’는 공경 대상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다. 초월적 창조주에서 사람(하늘·자연)으로, 죽음에서 삶으로 눈을 돌리자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개인이 아니라 ‘우리’다. 너 없인 나도 없다. 나에 대한 인식은 우리라는 관계 속에서만 가능해서다. 따라서 향아설위는 공동체를 공경한다는 뜻이다. 그 공동체는 모든 차별이 사라진 무등(無等) 세상이다. 해월은 동학 입문 후 36년간 관군을 피해 다니며 그런 공동체를 건설(후천개벽)하기 위해 매진했다. 그가 가진 재산은 보따리 하나뿐이었다. 그러다 수운처럼 참형을 당했다. 해월 또한 평생 민중을 떠나지 않은 ‘불이자’였다. ‘최보따리’라는 별명이 그 삶을 증언한다.

■한울님 되기

   
구미산 능선에 자리한 최제우 묘소.
‘인내천’이란 말을 사용한 건 의암이다. 1905년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면서다. 수운과 해월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동학 사상을 완성한 셈이다. 의암은 ‘한울님 되기(體天·체천)’를 강조했다. 개인적, 사회적 실천을 통해 사람의 가치를 한울님의 경지로 높여나가자는 사상이다. 그가 녹두장군 전봉준(全琫準·1855~1895)과 함께 동학혁명을 일으키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 동인이 된 3·1운동에 앞장선 건 그 연장선에서 한 일이다. 도덕 싸움(道戰·도전), 경제 싸움(財戰·재전), 언어심리 싸움(言戰·언전) 등 ‘삼전론(三戰論)’을 민족의 지침으로 제시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의암 역시 ‘불이자’였다.

   
‘사피엔스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세계적인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저서 ‘호모 데우스’에서 “짐승 수준의 생존투쟁에서 인류를 건져올린 다음에 할 일은 인류를 신으로 업그레이드하고, ‘호모 사피엔스’를 ‘호모 데우스’로 바꾸는 것”이라고 했다. 하라리는 유전공학, 나노기술, 뇌와 컴퓨터를 연결하는 인터페이스 등 첨단 기술에 의한 인본주의 신장이 ‘인류의 신 되기(호모 데우스)’를 도울 것이라고 했다. ‘한울님 되기’의 현대적 버전을 보는 듯하다. 동학은 ‘2020년 한국’이란 시공간에 국한된 사상이 아니다. 동학은 세계로, 미래로 소환되는 사상이다. 하여, 동학은 세계사상사에서 우뚝하다.

논설위원 yisg@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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