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월의 크리스마스’
- ‘봄날은 간다’ 두 편 영화로
- 명실공히 멜로 장인 등극
- 복귀작 ‘덕혜옹주’‘천문’은
- 예상하지 못했던 시대극임에도
- 허진호 표 감성 충만한 작품
- “진짜 하고싶은 게 뭔지
- 초심으로 고민하고 싶다”는 그
- 영화팬들은 어쩔 수 없이
- 그의 멜로를 다시 기다린다
지난달 26일 개봉한 ‘천문: 하늘에 묻는다’(이하 ‘천문’)는 조선의 가장 위대한 왕 세종과 가장 위대한 과학자 장영실의 우정을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덧댄 이야기로 묵직하게 그려 200만 관객을 모았다. 한석규 최민식의 연기도 일품이지만, 강렬한 두 배우의 밀고 당기는 호흡과 아름다운 영상으로 다듬은 허진호 감독의 연출력 또한 빛났다. 한국을 대표하는 ‘멜로 영화 거장’의 면모가 여실히 드러났다. ‘덕혜옹주’(2016)와 ‘천문’의 감독으로 그를 기억하는 10대와 20대 관객에게는 ‘멜로 영화의 거장’이라는 수식어가 낯설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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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을 대표하는 멜로 영화 감독이자 최근에는 ‘덕혜옹주’ ‘천문: 하늘에 묻는다’ 등 묵직한 시대극을 연출하며 거장의 풍모를 보여주고 있는 허진호 감독. 김정록 기자 |
1990년대 중후반은 한국 영화계에 젊은 피가 가장 많이 수혈된 시기였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의 홍상수 감독, ‘접속’(1997)의 장윤현 감독, ‘비트’의 김성수 감독(1997), 그리고 ‘8월의 크리스마스’의 허진호 감독(1998) 등이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 시대를 활짝 열었다. 그중 1998년 1월 개봉한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는 22년이 지난 지금도 한국 관객들이 가장 사랑하는 영화로 손꼽힌다. 지난해 한겨레신문과 CJ 문화재단이 함께 한 ‘한국 영화 100년, 한국 영화 100선’ 선정 작업에서 ‘가장 주목받은 10편’에 선정되기도 했다.
■서른에 영화에 들어서다
영화감독이라면 어린 시절부터 영화를 접하고, 창작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진 경우가 많다. 하지만 허 감독은 청소년기에 영화를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한 허 감독은 “뭔가 창작을 하고 싶었다. 영화는 아니었고 글을 쓰고 싶었다. 대학을 졸업한 뒤 계속 공부를 하거나 방송국 PD를 하고 싶었는데, PD 시험에서 떨어졌다”며 웃었다.
방송국 시험에 떨어진 허 감독은 회사에 다녔지만 창작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고, 서른 살에 한국영화아카데미에 입학했다. “아카데미에서 단편영화 작업을 하면서 적성에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척 게으른데 영화 작업 때는 부지런해지더라. 변화되는 모습을 보며 영화감독을 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영식 감독과 공동 연출한 한국영화아카데미 졸업 작품 ‘고철을 위하여’가 밴쿠버국제영화제에 초청받았고, 박광수 감독의 ‘그 섬에 가고 싶다’(1993) 연출부로 들어가며 충무로에 발을 들여놓는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5)에서 시나리오 공동 집필과 조감독을 맡으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전태일’ 때 보조출연자 연출을 맡았는데, 그때 감독 역량을 키울 수 있었다. 박 감독님께 영화를 만드는 자세와 개연성 있게 신을 만들어 가는 법, 배우와 소통하는 방식 등을 배웠다.” 그는 시나리오 작가로서도 두각을 나타냈는데, 이후 자신의 영화는 직접 쓰거나 각색을 했다. 오승욱 감독의 ‘킬리만자로’(2000) 시나리오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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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진호 감독이 연출한 영화들. 위 왼쪽부터 ‘천문’ ‘8월의 크리스마스’, 아래 왼쪽부터 ‘봄날은 간다’ ‘덕혜옹주’. |
■‘허진호 표’ 멜로
“지난해 군산(‘8월의 크리스마스’ 촬영지)에서 열린 옥상영화제에 가서 ‘8월의 크리스마스’를 봤다. 한석규 씨가 술 마시고 누워 있는 장면에서 마루에 빨래가 너무 많이 게 눈에 거슬리더라. 그런 식으로 연출과 대사가 자꾸 마음에 걸리면서 집중이 안 됐다.” 제아무리 칭찬받는 작품을 내놓아도 볼 때마다 아쉬움이 남는 것이 감독의 마음이다.
“‘8월의 크리스마스’는 한국영화아카데미 스승이신 고 유영길 촬영감독이 카메라를 잡아주셨고 좋아해 주셔서 저에겐 다른 느낌이 있다. 또 데뷔작이라 어떤 영화를 만들 것인가를 가장 많이 고민해서 의미가 있다.” 주연을 맡은 심은하의 스케줄이 여의치 않아서 출연하지 못할 뻔했으나 드라마 촬영이 미뤄지면서 함께 할 수 있었고, 황동규 시인의 ‘즐거운 편지’에서 가져온 ‘즐거운 편지’가 원래 제목이었으나 최진실 박신양 주연의 ‘편지’가 개봉하는 바람에 바뀐 것과 같은 후일담은 이제 편하게 말할 수 있다.
‘8월의 크리스마스’가 지금까지 많은 관객에게 사랑받는 이유는 사랑과 죽음을 다루지만 신파 대신 세련되고 절제된 연출로 감동과 여운을 주기 때문이다. “죽어가는 자의 일상이 무엇일까라는 질문으로 시작했고, 시간의 한계를 알고 사는 가운데 찾아오는 사랑은 일상의 한 부분이지만 굉장히 다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파적인 것을 꺼리지 않지만 시작점이 달랐기 때문에 절제된 감정 표현이 중요했던 것이다.
이후 3년 만에 내놓은 ‘봄날은 간다’(2001)는 ‘허진호=멜로’라는 공식을 만들었다. 영화 속 두 대사는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도 알 만큼 유명하다. 이영애가 유지태에게 한 “라면 먹을래요?”라는 대사는 지금도 “자고 갈래요?”라는 말과 동의어로 회자된다. 유지태의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는 이성의 변심으로 이별을 맞게 된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대사다. 허 감독은 “원래 ‘커피 한 잔 할래요?’였는데 현장에서 ‘라면’으로 바뀌었고,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는 일상적이지 않은 대사라 유지태 씨가 하기 어렵다고 했는데 몇 번 하다 보니 느낌이 좋아서 살리게 됐다”는 후일담을 전했다.
허 감독은 이후 배용준 손예진의 ‘외출’(2005), 황정민 임수정의 ‘행복’(2007), 정우성 고원원의 ‘호우시절’(2009), 장동건 장쯔이 장바이쯔(장백지)의 ‘위험한 관계’(2012) 등의 멜로 영화를 연출했다.
■감수성을 시대극에 접목
‘위험한 관계’ 이후 숨 고르기에 들어갔던 허 감독이 대한제국 마지막 황녀의 삶을 다룬 ‘덕혜옹주’를 연출한다고 했을 때, 세종과 장영실의 우정을 그린 ‘천문’을 연출한다고 했을 때 의외의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멜로가 전문인 감독이라 시대극과 잘 맞을까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하지만 각각 비운의 삶을 살았던 덕혜옹주의 나라에 대한 사랑과 신분을 뛰어넘는 브로맨스 같은 우정을 다룬 두 영화는 허 감독의 멜로 감수성과 디테일한 연출이 적합했다. 예를 들어 ‘천문’에서 장영실이 먹으로 칠한 창호지를 붓으로 구멍을 낸 후 촛불을 비춰 밤하늘의 별을 구현하는 장면은 잠시 시대극의 리얼리티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낭만의 시간을 준다.
허 감독이 느끼는 시대극의 매력은 뭘까. “솔직히 시대극은 불편하다. 촬영 현장에서 상황에 맞춰서 대사나 신을 바꾸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것이 한정돼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의 힘, 세월의 힘이 느껴지는 것은 시대극의 장점이다.”
‘천문’을 마친 허 감독은 초심으로 돌아간다. 데뷔작인 ‘8월의 크리스마스’를 준비할 때처럼 “내가 뭘 하고 싶은지 고민할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준비 중인 시나리오가 몇 편이 있는데, 다시 전공 분야인 멜로 영화를 할 수도 있고 새로운 장르에 도전할 수도 있다. 허 감독의 오랜 팬들은 멜로 영화가 극히 드문 한국 영화계에 허 감독이 다시 한번 멜로 영화의 향기를 발산해주길 바라지 않을까.
▶허진호 감독 필모그래피
-‘천문: 하늘에 묻는다’(2019)
-‘덕혜옹주’(2016)
-‘위험한 관계’(2012)
-‘호우시절’(2009)
-‘행복’(2007)
-‘봄날은 간다’(2001)
-‘8월의 크리스마스’(1998)
-‘고철을 위하여’(1993)
latehop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