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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혜경의 도시와 미술 <4> 광장과 기념의 미술, 그리고 일상

소외된 자 목소리 녹인… 트래펄가 같은 광장을 꿈꾼다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20-02-17 19:06:16
  •  |   본지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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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영제국 화려함·영광 상징 장소
- 여성 발언 등 일상의 다양성 추구

- 한때 수많은 시민 촛불 밝혔지만
- 이젠 정치 신념만 있는 광화문도
- 작은 목소리 함께 어우러지기를

막바지에 다다른 전시를 보기 위해 택시를 탔다. 택시기사에게 서울 종로구 삼청동으로 가자고 했더니 “그쪽으로 안 가는 것이 좋겠다”며 머뭇거렸다. “일단 가실 수 있는 곳까지만 가자”고 제안했다. 택시기사는 주말이면 시위로 몸살을 앓는 서울시청 앞 광장과 광화문 일대의 교통상황에 대해 불만을 이어갔고, 그의 예측대로 나는 목적지까지 가지 못한 채 중간에 내려야 했다. 광장은 다양한 정치적 신념에 가득 찬 서로 다른 결의 몸짓과 목소리로 넘쳐나고 있었다.
마크 퀸의 ‘임신한 앨리슨 래퍼’. 불구의 몸으로 태어난 여성 작가 앨리슨 래퍼의 임신한 몸을 조각한 작품.
나는 한때 영국 런던의 트래펄가 광장에 있는 제4좌대를 부러워했던 적이 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제4좌대를 활용한 ‘제4좌대 프로젝트(Fourth Plinth Project)’를 부러워했다. 1805년 영국 해군이 프랑스·스페인 연합군과 싸워 이긴 트래펄가 해전은 19세기 내내 영국에게 제해권을 장악할 수 있게 해 주었던 전투이자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의 기초를 세운 전투였다.

트래펄가 광장은 그것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것이니 올곧게 대영제국의 화려함과 영광을 드러내는 국가 상징 광장이다. 광장 중앙에는 프랑스와 스페인의 대포를 녹여 만든 사자상과 52m 높이의 넬슨 제독 기념 주가 있다. 네 모서리에 위치한 좌대에는 킹 조지 4세의 기마상, 찰스 제임스 네이피어 장군상, 헨리 하빌록 장군상이 놓여있다. 마지막 좌대에는 윌리엄 4세의 기마상을 세울 계획이었으나 무산된 뒤, 비어있는 4번째 좌대를 한 작가에게 의뢰하기보다는 동시대의 작가가 한시적으로 발언하게 한 것이 제4좌대 프로젝트다.

1999년부터 3년간 시범 운영 후 2005년부터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는 이 프로젝트에는 많은 작가가 참여했다. 마크 퀸은 불구의 몸으로 태어난 여성 작가 앨리슨 래퍼의 임신한 몸을 조각한 ‘임신한 앨리슨 래퍼’(2005)를 제시하며 이 사회의 소외된 자들과 몫 없는 자들에 대해 발언했는가 하면, 영국의 흑인작가 잉카 쇼니 바래는 ‘병 속에 든 넬슨 제독의 배’(2010)를 통해 트래펄가 광장과 넬슨제독, 대영제국과 아프리카의 관계를 성찰하게 했다.

2009년 100일 동안 진행된 안토리 곰리의 ‘one & other’는 영국 전역에서 추첨으로 선별된 2400명에게 각기 한 시간씩 좌대 위에서 살아있는 조각이 되도록 한 작업이었다. 여기에 참여한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시간 동안 법의 테두리 내에서 어떠한 행동도 가능했다. 참여자 중 어떤 사람은 가만히 앉아 있었고, 또 어떤 이는 책을 읽기도 했고, 노래를 부르는가 하면, 또 어떤 이는 정치적 프로파간다를 내걸고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제4좌대 프로젝트는 트래펄가 광장에 덧씌워져 있던 국가·정치·남성·권력·착취·군대라는 특성에 역사에서 소외된 자, 사회의 몫 없는 자, 소수자, 여성 등의 목소리를 결합해 동시대 우리들이 영위하는 일상의 다양성을 광장 속에 녹아들게 했다.

주말이면 걷기조차 힘든 서울 종로구 세종로 일대에 은행나무가 늘어서 있던 시절을 기억한다. 한강에서부터 남대문과 이순신상, 광화문을 거쳐 경복궁과 청와대로 이어지는 이 축은 가히 수도 서울과 대한민국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세종로를 국가 상징 거리이자 광장으로 부각하기 위한 청사진이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제시되는 것이리라.

이제 세종로는 은행나무와 자동차의 거리에서 시민들을 위한 광장으로 변했다. 그렇게 이루어진 광장에서 촛불을 손에 들었던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각인하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국가 상징 거리에 부합하도록 안치되었던 ‘이순신상’이나 ‘세종대왕상’보다도 훨씬 더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방식으로 이 광장은 2020년 대한민국을 오롯이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한때 촛불이 밝혀졌던 그 광장은 이제 주장은 있되 배려가 없고, 목소리는 있되 다양성이 없고, 시민들의 일상보다는 정치적 프로파간다가 넘쳐나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정치적 신념으로 넘쳐나는 이 광장에 우리가 살아가는 매일의 작은 목소리들이 함께 어우러질 날이 올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부산시립미술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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