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친구에게 먼저 말 붙이지 못해
- 하교 시간에도 책 파고든 아이
- 사람들 마음 속 깊은 상처 관심
- 학대 등 트라우마 다룬 글 8편
- 치밀한 심리 묘사에 동화된 듯
- 읽고나면 억울함·서러움 씻겨
- 마치 ‘심리 치유서’ 읽은 기분
누구의 삶이든 자세히 들여다보면 크고 작은 상처로 가득하다. 잠깐 아프다가 금방 아물어버린 생채기에서, 영원히 치유되지 않을 만큼 흔적을 남긴 큰 상처도 있다. 건드려도 아무렇지 않은 곳이 있는가 하면, 살짝 스치기만 해도 저리게 아픈 곳이 있다. 그런 상처들을 꽁꽁 싸매고 감추며 사노라면 얼마나 고단할까. 겉으로는 괜찮은 척하고 있어도 아픔은 긴 세월 멈추지 않는다. 과거에 경험했던 위기나 공포와 비슷한 일이 발생하면 당시의 감정이 생생하게 되살아나며 심리적 불안을 겪는 사람들도 있다. ‘트라우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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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픈 상처를 지닌 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인 ‘녹색 전갈’을 쓴 김서련 작가가 부산 기장군 일광 바닷가에 서 있다. |
김서련 소설가는 사람들이 마음속 깊이 가지고 있는 상처를 아프게 들여다보았다. 그의 소설 ‘녹색 전갈’에는 아픈 상처를 지닌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기장군 일광 바닷가에서 작가를 만났다.
■책만 읽던 소녀
겨울 바닷가는 바람이 찼다. 산책 나온 시민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김서련은 이 바닷가에서 글을 쓴다. “일광 바닷가는 정말 자주 오는 곳이에요. 커피 마시러 오고, 소설 쓰려고 오고, 일도 하고, 책도 읽고요.” 그는 거의 10여 년 동안 이 바다를 찾아왔다. “처음에는 커피숍이 없었어요. 낮에는 분식을 팔고, 밤에는 술을 파는 포장마차들이 몇 곳 있었죠, 낮에 바다를 찾아와 포장마차에서 커피를 마셨어요. 언젠가부터 커피숍이 하나씩 늘어가기 시작했어요. 그때부터는 바다가 보이는 커피숍 창가가 제 자리였습니다.”
김서련은 1960년 경남 김해 진영에서 태어났다. 1998년 ‘나비의 향기’로 ‘월간문학’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슬픈 바이러스’ ‘폭력의 기원’ ‘녹색 전갈’을 냈다. 2003년 부산소설문학상, 2006년 김유정문학상, 2012년 요산창작기금을 수상했다.
그가 나고 자란 마을 이름이 ‘양지마을’이다. 햇볕이 따뜻하게 고루 내리는 마을인가보다. “중학교 2학년 때 전깃불이 들어왔어요. 마을 앞에 철길이 있었고, 그 길을 따라 학교로 가는 게 좋았어요. 해뜨기 전에 집을 나서서 철길 따라 학교 가는 길에 뜨는 해를 보는 게 매일 아침의 작은 행복이었지요. 달이 뜨면 온 세상이 숨 막힐 듯 아름다운 은빛이었습니다. 강에서 놀다가 발밑이 까슬까슬하면 조개도 주웠어요.” 푸르고 맑은 자연 속에서 자란 그의 유년 시절은 아름다웠다. 그 기억 속에서도 책 읽는 장면이 가장 근사했다. “시골 마을 아이들은 어렸을 때도 집안일을 도우면서 자라지요. 그런데 전 일 안 하고 숨어서 책 읽었어요.(웃음) 강가에 빨래하러 갈 때 빨랫감 사이에 책을 숨겨가서는 강가에서 읽었어요. 오후에 햇살이 퍼질 때면 볏짚 더미 위에 앉아 책 보는 게 제일 좋았답니다.”
소설을 좋아해서 집안의 책을 다 읽어치운 다음에는 동네 집마다 책을 찾아다녔다. 그 시절 친구들이 기억하는 모습도 ‘늘 책만 읽던 아이’란다. 중학교 시절에는 도서관에서 책 읽다가 갇히는 일도 있었다. 어둑어둑해졌는지도 모르고 책만 읽던 김서련 학생을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밖에서 문을 잠갔기 때문이다. 캄캄한 복도를 향해 문을 두드린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단다,
“어쩌면, 그렇게 책을 파고든 것이 무언가로부터 도피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싶어요. 지금도 소설을 쓰면서 제 유년 시절을 되짚어보고 있어요. 어렸을 때 아이들에게 먼저 말을 붙이지 못했는데, 뭔가 있는 게 아닐까요. 저의 트라우마를 찾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그런 아픔을 가진 존재입니다.”
■소설은 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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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녹색 전갈- 김서련·2017·전망 |
소설집 ‘녹색 전갈’은 8편의 소설을 통해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표제작 ‘녹색 전갈’은 어렸을 때 이웃과 싸우며 낫을 휘두르는 아버지를 본 여성, ‘단발머리’는 억지로 딸의 머리를 잘라버린 뒤 딸과 데면데면한 관계가 돼버린 치매를 앓고 있는 어머니, ‘탁상 곰파’는 어린 시절 부모의 죽음을 겪은 여성이 등장한다. 8편 소설의 주인공들이 모두 트라우마를 가지고 살아간다. 모두가 ‘나’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들의 마음은 치밀하게 묘사된다. 드러내지 않은 상처가 일상을 밑바닥에서부터 보이지 않게 흔들고, 뚜렷한 정체가 없는 불안은 누군가와의 관계 맺기에 자꾸만 끼어든다. 어쩌면 이런 상처와 관계는 ‘트라우마 환자’들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조금씩은 느끼는 문제들이다.
‘나’의 심리는 김서련의 문체를 통해 세세하게 드러난다. 읽는 동안 작가도 함께 아파하는 게 느껴지고, 작품 속의 ‘나’에게 동화돼버리는 기분이다. 필자의 경우는 ‘나도 이런 감정 느낀 적 있다’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다. 그래서인지 읽고 난 다음에는 ‘나’가 되어 느꼈던 그 서러움이랄까, 억울함 같은 것이 조금쯤은 씻기고 사라진 것 같았다. 소설 심리 치유서를 읽은 기분이었다. 작가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면 정말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소설집 ‘작가의 말’에서 이렇게 썼다.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생각이 있다. 부모가 자식을 학대하고 어른이 아이의 죽음을 방치하고 부부가 원수가 되어 헤어지고 친구가 친구에게 주먹을 휘두르고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상대에게 폭언과 막말을 예사로 뱉어내고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사람들을 죽이고… 분야마다 일어나고 있는 부당한 관계들,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폭력들. 그것의 근원은 무엇일까. 그것은 어떻게 해서 일어나는 것일까. 내가 쓰고 싶은 것은 바로 그 근원이다. 그리고 그것의 근원에 대해 알게 된다는 건 다시 관계를 회복하고 살아가는 힘을 얻게 된다는 거였다.”
‘그 사람의 무엇이 그런 행동을 하게 만들었을까’하는 문제는 김서련 소설가가 오래도록 관심을 가고 천착해 온 소설의 주제이다. 생각하고, 질문하고, 모색하고, 그리고 쓴다. 그의 소설에는 트라우마가 지배하는 한 사람의 삶이 있다. 그의 소설을 읽은 것은 한 사람을 이해하는 일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은 소설은 또 다른 형태의 심리학이다.
책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