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를 담은 푸른색, 가을을 담은 붉은색 등 다양한 원색의 아크릴 물감을 평면에 하나씩 칠하고 말리고, 다시 칠하고 말리는 과정을 수백 번 반복한다. 물감은 켜켜이 쌓이고 화석처럼 단단하게 굳는다. 물감 저 너머에는 어떤 형상이 꿈틀거리고 있을까. 완전히 마른 물감은 돌덩이 같다. 긁어낼 때 소음은 칠판을 칼로 긁을 때 나는 소리를 연상시킬 정도다. 허경애 작가는 특수 제작한 귀마개를 쓰고 칼로 물감을 긁어내기 시작한다. 고고학자가 공룡 화석을 감싼 돌덩어리를 들어내는 것처럼 치열하고 고요하다. 작가는 긴 시간 동안 물감을 반복해서 긁어내고 물감이 사라진 자리에는 생명력과 숨결이 내려앉는다. 캔버스에는 물감 파편이 형형색색의 봄꽃처럼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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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경애 작가의 ‘No. VP0915B3’(가로 140㎝ 세로 210㎝). 갤러리 메르씨엘 비스 제공 |
그의 개인전 ‘봄꽃’이 부산 해운대구 달맞이길에 있는 갤러리 메르씨엘 비스에서 열리고 있다. 판화를 전공했던 작가는 프랑스 파리에서 대학 생활을 시작하면서 개념 예술과 디지털 영상 작품까지 다양한 영역을 시도했지만 만족스럽지가 않았고 결국 다시 캔버스와 물감 앞으로 돌아왔다. 판화 작업인 긁기를 떠올리고 색을 입혀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색을 벗겨내 새로운 색을 발견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캔버스 위에 올리는 물감은 40~70층. 색은 본능과 직감에 따라 결정하지 않는다. 작가는 작품 구성 단계에서 물감을 벗겨낸 흔적과 질감까지 계산한 후 그에 맞춘 색을 차례로 칠한다. 흑백 톤으로 아크릴 물감층을 올리기도 하고, 물감을 섞어 색을 만든 후 칠하기도 한다. 어떤 색을 올렸는지 기록을 남기는 일은 잊지 않는다.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처럼 물감을 뿌리거나, 붓으로 바르는 등 물감을 캔버스에 올리는 방법은 작업 때마다 다르다. 이 때문에 칼로 긁어서 드러난 색을 예측하기란 어렵다.
이런 방법으로 작가는 필연과 우연이 결합해 나타난, 구상과 추상이 만난 그림을 선보인다. 전시 작품 중 초록색이 가득한 ‘No. VP0915B1~3’ 3점은 작가가 집 앞에 심은 대나무 화분이 어느 순간 울창한 대나무 숲이 되어버린 경험을 떠올리며 남긴 그림이다. 화사한 노란색이 인상적인 ‘No. JP0318BP’는 마치 유채꽃밭을 형상화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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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경애 작가의 ‘No. JP0318BP’. |
처음에는 화사한 원색에 눈길이 가지만, 칼질이 남긴 색 아래 감춰진 흔적에 시선이 머물렀다. 그 흔적에는 여러 각도로 중첩되면서 변화하는 색, 어둠 속에서 더욱 밝게 드러나는 색의 모순적이고 역설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색을 쌓아 올린 시간을 긁어서 생긴 골은 삶의 흔적을 떠올리게도 한다.
작가는 파리 소르본 대학교에서 조형 예술 석사를 마치고 현재 프랑스 에브르에 살면서 작업을 하고 있다. 홍콩 공아트스페이스, 헝가리 칼만 마클라리 갤러리 등에서 십여 차례 개인전을 열었다. 전시는 다음 달 11일까지.
권용휘 기자 real@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