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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백의 테마기행 <1> 남미 파타고니아 ①

태고의 신비 간직한 초원·빙하…‘세상의 끝(fin del mundo)’에서 시작을 노래하다

논설위원이 여는 페이지

  • 국제신문
  • 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20-03-18 19:35:03
  •  |  본지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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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남미를 다녀왔습니다. 물론 처음입니다. 언제 다시 오겠느냐는 생각에 가슴은 두근두근했습니다. 아시잖아요. 얼마나 먼 곳인지. 지구 반대편, 비행기 타는 것만 20시간이 넘습니다. 다녀온 곳은 칠레 아르헨티나 브라질 등 3개국 8개 도시입니다. 핵심은 파타고니아라는 곳이었어요. 뭐 하러 그 먼 곳까지 갔느냐고요. 그냥 머리 좀 비우러 갔습니다. 보통 그렇게 말하잖아요. “일상에 지친 당신 떠나라.” 낯선 곳을 막 걷다 보면 잡념이 없어지거든요. 그것도 세상의 끝이라고 불리는 곳을 걸었습니다. 새로운 일상을 이렇게 준비한 것입니다.


- 세상 등지고 일상에 지친 이들
- 악명 높은 추위·거센 바람 뚫고
- 토레스 델 파이네·피츠로이 등
- 압도하는 대자연 보려 모여들어

- 농장 차지한 에스파냐·포르투갈인
- 개척 명분 인디오 학살한 유럽인
- 식민지 역사는 남미 양극화 발단
- 불안한 사회체제 현재까지 계속

추방자의 땅, 이방인의 땅이라고도 불렸다. 첫 느낌이 딱 그랬다. 버스를 타고 1시간을 달려도 지평선이 보이는 곳. 사람은 없고, 소떼와 과나코 같은 동물만 간혹 눈에 띄는 벌판은 너무 넓어 오히려 황량했다. 안데스산맥 끝자리에 자리 잡은 탓에 산은 접근이 힘들 만큼 험했다. 세상을 등진 이들이 찾아든 데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숨어 살기에는 그지없는 곳이었다. 하물며 범죄자처럼 과거를 숨겨야 했던 이라면 두말할 필요가 없다. 삶의 끝에 내몰린 이들이 이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래서 음습한 땅의 기운이 감돈다고 한다.
   
칠레 중부 휴양도시 푸에르토 바라스의 양키우에호. 수평선 넘어 만년설이 쌓인 안데스 산맥의 오소르노 화산 풍경과 어울려 아름답다. 만년설이 녹아 만들어진 이 호수는 면적이 450만 ㎢, 수심이 1500m나 된다.
■역사의 끝과 시작

파타고니아. 오지 중 오지다. 거센 바람은 사람 살가죽을 벗겨내는 듯하고, 3~4개월의 여름을 제외하면 겨울 같은 추위가 내내 이어질 만큼 기후는 열악하다. 이곳에서 새 출발한 유럽인은 식민지 개척사를 열어갔다. 불모의 땅을 개척한다는 명분으로.

   
남미 최남단 도시 우수아이아의 역사박물관 벽화에는 원주민 학살 등 도시 형성의 역사가 소개돼 있다.
이는 원래 땅 주인에게 삶의 종말을 의미했다. 식민지 개척사의 시작은 인디오 역사의 끝이었다. 유럽인은 인디오를 철저히 박멸했다. 존재조차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지금은 순혈 인디오가 인구의 1%도 되지 않는다니, 인종 청소가 얼마나 철저했는지 짐작케 한다. 그 대가로 전쟁에 참여한 유럽인은 2000㏊씩의 땅을 받았다. 600만 평의 대농장주가 된 것이다. 이들이 곧 라틴아메리카 지배계층의 원조다. 이들은 식민지 개척촌을 유럽의 고향 마을처럼 꾸몄다. 백인의 나라로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그 사이에 인디오의 흔적은 지워졌다. 아픈 과거다. 그렇다고 인디오가 보상받을 길은 없다. 세상은 살아남지 못한 이들을 기억하지 않으니까. 그나마 박물관 벽화에 ‘색깔의 역사’란 제목으로 슬픈 역사를 간략히나마 기록해 준 것에 고마워해야 할 판이다.

승자는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이제 백인의 세상이기에. 새 주인들은 파타고니아를 ‘세상의 끝(fin del mundo)’이라고 불렀다. 끝은 시작을 의미한다. 여기에도 승자의 인식이 담겨 있다. 세상의 끝에 버려진 땅까지 쫓겨 와 새 삶을 개척했다는 자부심이 느껴진다. 지구가 둥근데 끝이 어디 있느냐는 반박이 이래서 나온다. 하지만 오늘도 관광객들은 파타고니아를 찾고, 최남단 도시 우수아이아의 ‘세상의 끝’ 이정표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다. 끝과 시작이 주는 묘한 뉘앙스 탓에 과거 슬픔은 느낄 틈이 없다. 그래서 더 아프다.

   
아르헨티나 바릴로체의 캄파나리오 언덕에서 내려본 나우엘 후아피 호수. 바릴로체는 아름다운 호수마을로 남미의 알프스로 불린다.
■패자의 음덕, 승자의 갈등

그런데도 파타고니아는 승자에게 부를 선사했다. 광활한 초원은 양떼 소떼 농장에 적격이다. 아르헨티나가 2차 대전 이전 세계 10대 강국이었던 것도 초원 덕이었다. 지금도 아르헨티나는 인구 1명에 소가 2마리라고 하니 축산 대국의 면모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게다가 요즘 파타고니아는 뜨는 관광지다. 토레스델파이네 피츠로이 모레노빙하 등의 비경을 보려고 관광객이 몰려든다. 모두 패자의 베풂이다.

승자라고 모두 역사의 주인이 될 수는 없는 법이다. 물질이 불평등한데 사람이 평등할 수 있나. 개척사 초창기 드넓은 땅을 차지한 에스파냐인과 포르투갈인은 대농장주가 됐다. 땅은 개척해야 하는데, 인디오는 거의 다 죽였다. 그래서 뒤늦게 쫓아온 유럽인에게 이 일을 맡겼다. 사회 밑바닥은 이들의 차지였다. 이들은 정복자였지만, 아웃사이더이기도 했다. 남미 대륙의 양극화 발단이고 또 다른 불행의 시작이었다. 빈부격차가 극심하지만, 사회 안전망은 취약해 계층 갈등은 심하고 체제는 늘 불안하다.
   
아르헨티나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루타 40번 도로변이 일출로 붉게 물들어 있다.
이런 측면에서 포퓰리즘의 현재적 기원으로 꼽히는 페로니즘이 아르헨티나에서 탄생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세계 청년의 영원한 우상인 혁명가 체 게바라도 아르헨티나 출신이다. 아르헨티나의 ‘루타 40번 도로’에는 지금도 게바라를 추모하는 세계 청년들이 몰려든다. 의사 출신인 게바라가 오토바이를 타고 이 도로를 달리면서 양극화 문제에 눈을 뜨고 혁명에 투신했다는 전설(?) 때문이다. 여러 측면에서 파타고니아는 참 재미있는 곳이다.

   
이래서 파타고니아는 일상에 지친 이들을 불러 모으는 것 같다. 새로움, 예측 불허의 가변성을 찾아 떠나는 게 여행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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