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어귀마다 메마른 가지 사이로 새하얀 목련꽃이 활짝 피었다. 점심을 먹고 지나가는 꽃집에서 파란 히아신스 화분을 사다 사무실 한쪽에 놓았다. 베란다의 화분들에는 저마다 움이 튼다. 좋아하는 블루베리 화분의 겨울눈 자리에 연한 새순이 돋았다. 화단을 가꾸는 엄마는 벌써 장미꽃이 피었다며 사진을 보내주셨다. 지난주에는 따뜻한 봄비가 내렸다. 볕도 따스워졌다. 유난히 길게만 느껴졌던 겨울이 지난다. 봄이 불현듯 우리 곁에 와 있다.
이상하게 봄의 단어에는 어떤 형용사를 붙이지 않아도 충분한 것 같다. 봄, 봄비. 생명이 시작되는 계절이기 때문일까. 그런 봄의 식물들을 체감하게 되는 날 다시금 이 책을 마주한다. 지난해 초여름, 제주도 남녘 서귀포 작은 동네 서점에서 나는 이 책을 집어 들었다. 서점을 들르기 전 제주 해안가에서 이름 모를 꽃과 푸르게 돋아난 온갖 식물들의 사진을 찍으며 식물이 가진 디테일을 카메라가 담아내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시점에서 식물을 그리는 사람이 쓴 책은 그날 내게 운명적인 만남처럼 느껴졌다. 고작 한 권의 책인데도.
식물을 그리는 직업, 그리고 식물을 관찰하는 방법에 대한 호기심에 덧붙여 세계 곳곳의 식물원을 산책하며 담담하게 쓴 일기장 같은 문장들과 사진들을 읽으면 저자가 가지고 있는 식물에 대한 애정과 연구자로서의 열정을 엿볼 수 있다. 한 장의 식물화를 그리기 위해 사계절의 변화를 지켜보며 주기적으로 하나의 식물을 자세히 관찰하는 일, 그려야 하는 식물이 있는 곳이 산속이든 어느 먼 외국이든 시간을 들여 찾아가 채집하고 연구하는 과정을 들여다본다.
책에서는 무언가를 자세히 들여다보는 일은 곧 사랑하는 마음에서 시작된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셨다는 아버지의 삶이 저자의 삶으로 이어진 거라는 생각을 책의 말미에서 하게 된다. 꽃을 좋아해 언제든 꽃 사진을 찍어 보내시는 어머니의 삶이 봄이면 꽃 화분을 들여놓는 내 삶으로 이어졌듯이. 말이 없는 식물은 자세히 들여다보아야만 그들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다. 좋아하는 것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기록해 세상에 남기는 일을 직업으로 삼은 저자가 못내 부러운 건, 이미 시작되는 봄 내음을 맡아서일까.
묵묵히 삶을 살아내고 꽃을 피워내는 식물의 존재가 일상이 더는 일상적이지 않은 요즈음의 삶에 있어 내게 더더욱 필요한 것이 되었다. 겨우내 앙상하게 말라 죽은 줄만 알았던 가지에 푸른 잎이 돋아나는 순간들을 지켜보는 것에서 사소한 기쁨을 찾는다. 이제 봄의 기운을 느끼며 걷는 길에서 희망이 움튼다. 아직 겨울처럼 죽음의 기운이 만연한 날들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결국 푸른 생명의 싹이 틀 거라고 믿는다.
매거진 ‘다리 너머 영도’ 편집팀장· 플랜비문화예술협동조합 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