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덕행 ‘끝판왕’ 제자 안연 죽자
- 공자도 대성통곡하며 슬퍼해
- 위험 보면 목숨 내놓겠다던 자로
- 결국 내전 뛰어들어 장렬한 최후
- 뛰어난 사업가였던 거상 자공
- 공자학단 명맥 유지 일등공신
코로나19 사태로 꽁꽁 닫혔던 학교 문이 오늘 ‘일부’ 열렸습니다. 온라인 개학이란 궁여지책을 썼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중·고교 3학년부터 순차적으로 이뤄집니다. 초·중·고교생이 가정에서 듣는 원격 수업을 정식 수업으로 인정하는 온라인 개학은 사상 처음이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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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서상균 |
정세균 국무총리 말처럼 대한민국은 한국전쟁 중에도 천막교사를 설치하고 학교를 운영한 나라입니다. 답답하긴 학생도 교사도 학부모도 마찬가지인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개학을 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교육이 희망이라는 생각.
대학이라고 사정이 다르지 않습니다. 온라인 강의를 이미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화여대처럼 한 학기를 통째로 온라인 강의로 채우려는 대학도 늘어납니다. 교육부가 전체 강의의 20%를 초과할 수 없다는 온라인 강의 제한 규정을 한시적으로 풀면서 가능해졌습니다.
코로나19는 어쩌면 새로운 교육 패러다임을 앞당기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일상적 교육의 위기가 오히려 새로운 교육의 발판이 되는 셈입니다. 4차 산업혁명시대 아닙니까.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기회를 제공하고 맞춤형 쌍방향 교육이 가능하다면 시간과 장소의 한계를 뛰어넘는 혁신이 먼 일은 아닙니다.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하며 현재가 편안한 사람들의 양보가 필요합니다.
2500년 전 공자가 그 문을 열었습니다. ‘유교무류’(有敎無類), 권력자만 대상인 교육을 원하는 모든 사람이 받을 수 있게 했습니다. 맞춤형 교육을 실천했습니다. 인(仁)을 두고 수행비서 번지에겐 ‘사랑’, 수제자 안연에겐 ‘극기복례’라며 수준을 달리했습니다. ‘인에 대해선 스승에게도 양보하지 말라’는 토론을 통한 쌍방향 교육도 중요합니다. 이렇게 훌륭한 스승 밑에 훌륭한 제자가 따르게 마련이지요. 유가의 맥이 그렇게 면면히 흘러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아르헨티나의 국민가수이자 라틴아메리카 누에바 칸시온의 대모로 불리는 메르세데스 소사의 ‘Gracias A La Vida’(QR코드 스캔 또는 인터넷 주소 https://youtu.be/cIrGQD84F1g)를 들으며 공자와 ‘사과십철’의 발자취를 살펴보겠습니다.
■유가의 맥을 잇지못한 수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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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라인 개학에 앞서 원격 수업 테스트 중인 한 중학교 교실. 연합뉴스 |
‘논어’(論語) 11편(선진) 2장을 보겠습니다. 공자께서 제자 10명을 꼽습니다. 덕행엔 안연 민자건 염백우 중궁, 언어엔 재아 자공, 정사엔 염유 계로, 문학엔 자유 자하입니다. ‘공자께서 사람을 가르칠 때 각각 그 바탕을 따르셨다’고 주자는 설명했습니다. 덕행 언어 정사 문학을 합쳐 사과(四科), 제자 10명을 십철(十哲), 이렇게 ‘사과십철’(四科十哲)이란 말이 나왔습니다.
공자 제자가 3000명에 이르며, 사마천의 ‘사기’(史記) ‘중니제자열전’엔 육예에 능통한 자가 77명이고 모두 재능이 특출했다고 했으니, 그 중 사과십철은 더욱 두드러집니다. 사과는 공자께서 힘썼던 인문학 과목으로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인의 기본인 덕행, 정치적 응대와 외교적 수사인 언어, 치국을 위한 정사, 고전에 능통한 문학이 모두 정치행위와 관련된다는 점이 주목됩니다. 수기치인(修己治人), 스스로를 닦아 현실 정치에 쓰임이 있게 하겠다는 공자 교육의 당면 목표를 확인할 수 있지요. 또 육예(六藝), 예·악·사·어·서·수(예의·음악·활쏘기·말타기·글쓰기·셈하기)는 기본입니다.
사과십철 중에서도 안연은 학문과 행실이 특별합니다. 사과십철은 공자께서 천하를 떠돌며 인치를 실현할 군주를 찾다 진(陳)나라와 채(蔡)나라 사이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 함께 했던 제자들입니다. 굶주림에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는 상황이지만 안연은 달랐습니다. 이레를 피죽도 못 먹다가 안연이 겨우 쌀을 구해 밥을 짓습니다. 그 귀한 밥을 안연이 한 숟가락 먼저 먹습니다. 공자께서 살짝 노여워 할만 하죠. 짐짓 모른 체하고 그 이유를 물었더니, 잿가루가 솥에 들어가 걷어 먹었다는 것입니다. 정성을 다하는 모습이 한결같은 이 사례는 ‘여씨춘추’에 나옵니다. 덕행의 끝판왕이랄까요.
안연이 공자보다 앞서 세상을 뜨니 공자께서 ‘하늘이 나를 버리셨구나’하며 대성통곡했습니다. 아들인 리(백어)에 이어 수제자를 잃었습니다. 부자의 연이 끊어지는 아픔에 더해 사제의 연, 자신이 세운 유가의 맥이 끊어지는 것 같은 아픔이었을 것입니다.
“스승님의 도는 우러러볼수록 더욱 높고, 뚫을수록 더욱 견고하구나. (…) 차근차근 이끄시어 문(文)으로 나의 지식을 넓혀주시고, 예(禮)로 나의 행동을 요약해주셨다.” 9편(자한) 10장에 나오는 안연의 말입니다. 스승의 날 부르는 ‘스승의 은혜’ 첫구절이 떠오르지 않나요.
■등장도 퇴장도 그다운 호위무사
자로(계로)는 공자보다 아홉살 어린 제자입니다. 그가 등장하는 장면도 극적이고 퇴장하는 장면은 더 극적입니다.
자로는 말이나 행동이 단정하지 못하고 거친 왈짜였습니다. 자로는 공자를 처음 만났을 때, ‘장검을 좋아한다’고 뻐깁니다. ‘화살에 깃털을 붙이고 화살촉을 간다면 화살이 깊게 박히지 않겠는가’하는 공자의 가르침에 제자가 됐습니다.(‘공자가어’) 자로가 공자 학단에서 호위무사 역할을 한 뒤로 공자를 헐뜯는 이야기가 사라졌습니다.
자로는 그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여러 번 공자께 대듭니다. 진나라와 채나라 사이에선 정색을 하고 ‘군자도 곤궁해질 때가 있습니까’하며 따지지요. ‘군자는 곤궁함을 굳게 버티지만 소인은 곤궁해지면 아무 짓이나 한다’는 공자 말씀이 그때 나왔습니다.
공자께서 자로를 인정하는 장면이 인상적입니다. “당에 올랐으나 방에 들어 오진 못했다.” 자로가 크고 밝은 경지에 올랐으나 핵심엔 미치진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이익을 보면 의를 생각하고, 위험을 보면 목숨을 내놓겠다’던 자로는 그 말처럼 장렬한 최후를 맞습니다. 위나라 내전에서. ‘군자는 죽는 순간에도 갓을 벗지 않는다’는 말을 남기고.(‘춘추좌씨전’)
■공자 학단 지탱, 재주 많은 거상
공자 사후(BC 479) 제자들이 3년상을 치르고 떠나자 자공은 3년을 더 공자묘를 지켰습니다. 공자께서 천하를 떠돌 때, 노나라로 돌아와 제자들을 가르칠 때 자공이 경제적으로 뒷받침했습니다.
‘천명을 받아들이지 않고 재화를 늘렸으나 예측이 자주 적중’한 자공이었습니다. 그만큼 큰 부자였습니다. “자공이 네 마리가 끄는 마차를 거느리고 비단 꾸러미를 갖춰 제후들을 찾으니 예를 높이지 않음이 없었다. 공자가 이름을 천하에 떨친 것은 자공이 전후에서 주선한 덕분”이라고 사마천은 평가했습니다.
게다가 자공은 외교술에 능했습니다. 그가 위기에 빠진 노나라를 구하고자 사신으로 나선 10년 사이 다섯 나라에 변화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자공도 도반인 원헌에게 무안을 당합니다. 재산을 은근히 자랑하다 ‘돈이 다가 아니다’는 말을 들은 것입니다. 돈도 말솜씨도 사람 대하는 능력도 다 갖췄지만 그게 오히려 화근이 될 수도 있지요. 공자께서 자공에게 누누이 경계하라고 일렀던 그대로입니다.
하지만 공자 학단이 오늘에 이르게 하고 공자의 말씀을 정리한 ‘논어’가 있게 한 공로자 역할만큼 큰 것은 없습니다.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했나요.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하는 제자도 있었겠지요. 그땐 정신이 번쩍 들도록 야단을 칩니다. 낮잠을 자던 재아에게 “썩은 나무는 조각할 수 없고, 거름흙으로 쌓은 담장은 흙손질할 수가 없다”거나, 염유가 권력자에 빌붙어 백성에게서 세금 뜯어내는 일에 매달리자 “내 제자가 아니다”고 선언한 것이 그 예입니다.
이처럼 한없는 부드러움과 추상같은 엄격함이 공존하는 공자 학단이었습니다. 보통 교육, 맞춤형 교육, 토론식 교육의 싹이 그렇게 텄습니다. 사람이 중심인 사회, 갈등과 차별 없는 대동사회가 지향점입니다. 교육의 형식은 시대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현실에 갇히지 말고 너른 시야로 바른 길을 찾아봅시다.
영국 얼터너티브 록밴드 콜드플레이의 ‘Paradise’(QR코드 스캔 또는 인터넷 주소 https://youtu.be/1G4isv_Fylg)를 들으며 마치겠습니다.
수석논설위원 jsdo@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