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활가전 집안일 줄인다 했지만
- 청결·위생 기준 갈수록 높아져
- 지난 100년 노동시간 되레 증가
- 최근 감소세는 페미니즘 운동 덕
울컥했다. “엄마는 밥 하는 사람”이라는 아이의 말을 들었을 때의 기분과는 또 달랐다. “가사기술이 여성들을, 주부들을 가사노동에서 해방시켰는가”라는 질문에 정면에서 “아니다”고 말하는 책을 만나서다. 식사를 준비할 때 전기밥솥, 가스레인지를 이용하고 간간이 레토르트(즉석조리) 식품을 요리하고, 설거지는 식기세척기의 도움을 받는다. 빨래는 세탁기가, 청소는 청소기가 하는데도 집에서는 하루종일 가사노동에 시달리는 기분이다. 앞선 세대와 비교해 배부른 투정 같아 입 밖으로 꺼내기 힘들었지만 ‘세탁기의 배신’은 “여성들이 집안일에서 해방된 적은 없다”며 주부의 힘든 가사노동을 알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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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G전자가 1996년 부산지역 각 대리점을 순회하며 식기세척기 세탁기 등 가전제품 실연 판매행사를 하는 모습. 국제신문DB |
가전제품은 주부들에게 편리함, 편안함, 효율성을 준 대신 더 많은 일을 만들어주었다는 게 전체 내용이다. 세탁기가 힘든 빨래를 힘이 덜 들게 하고 과정을 단순화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20세기가 지나면서 개인위생과 청결 기준은 훨씬 높아졌다. 아침 저녁 가족 수만큼 수건이 쏟아져 나오고, 매일 셔츠와 외출복이 세탁기에 쌓여 간다. 세탁기 때문에 가사노동의 강도가 줄어 든 대신, 빨래 횟수가 늘어나면서 세탁에 드는 총시간은 오히려 증가하게 됐다. 저자는 가전제품이 여성을 해방시키기는커녕, 결과적으로 주부들에게 또 다른 일거리를 만들어 주면서 ‘집안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지겨운 일과가 돼 여성들을, 주부들을 해방시키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특히 1920년대 미국 소비자본주의의 첨병에 선 광고 사진들을 통해 당시 가전제품의 광고 메시지가 소비자(주부)의 욕망을 어떻게 충족하고 설득시켰는지를 보여준다. 당시 상품 광고의 이미지들과 메시지를 통해 표현된 가사기술의 능력과 이상적인 여성상은 ‘지옥 같은 세상’에서 남편이 고군분투한 뒤 집으로 돌아오면 아내는 집을 ‘천국 같은 안식처’로 만들어놓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수사법이었다.
저자는 지난 100년간 가사노동의 사용시간이 감소되었다고 보는 학자도 있지만, 이는 가사기술의 도입과는 상관관계가 없다고 말한다. 웬만한 가전제품들이 포화상태에 이르던 1950~60년대에도 가사노동시간은 크게 줄지 않았기 때문이다. 1960년대 후반 이후 미국에서 주부의 가사노동시간이 감소한 것은 집안의 기계화와 전기화가 가져다 준 현상이라기보다는 페미니즘 운동의 영향력 하에 남편의 가사노동 참여가 증가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안타깝게도 저자의 분석대로라면, 현재와 같은 소비자본주의 체제하에서 더 많은 가전제품이 출현하더라도 역사학자 루스 코완이 제기한 ‘기이한 패러독스’는 해결되지 않을 것 같다. 100년간 노동절약을 목표로 한 가사기술은 주부의 힘든 일은 줄여주었는지 몰라도 가사노동시간은 줄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저자가 주목한 근본적인 이유는 남편의 일자리에선 노동에 대한 대가로 임금이 제공되지만 가사노동은 시장경제에 포함되지 않는 ‘그림자노동’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낱 같은 희망이지만 가사노동이 남편과 아내 사이에서 최소한이라도 공평하게 분배되고, 여기에 자녀들이 자발적으로 가사노동에서 자신들의 일을 찾아 부모를 돕는다면 ‘코완의 패러독스’는 상당부분 해결될 여지가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임은정 기자 iej09@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