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탑의 조형미 제대로 담고 싶어
- 손묵광 사진가 몇 년간 전국 출사
- 틈만 나면 산으로 절로 탑여행
- 석공들의 손길, 백성의 마음
- 돌의 질감과 명암까지 보여주려
- 흑백사진으로 한 컷 한 컷 작업
- 손 씨 열정에 반한 이달균 시인
- 탑의 역사 기록하려 시조 선택
- 책 속 70기 모두에 한 수씩 담아
지리산을 오르면서 천왕봉 아래 로터리 산장을 여러 번 가보았다. 몇 걸음만 더 걸어가면 법계사가 있는데, 부끄럽지만 지친 몸을 핑계 삼고 보러가지 않았었다. 그러니 법계사에 보물 제473호로 지정된 고려 초기의 삼층석탑이 있다는 것을 몰랐다. 해발 1450m.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천년이 넘도록 서있는 그 탑을 지리산 정상까지 올라가는 길에도 보지 못했다니 뒤늦게 후회막심이다. 그뿐이겠는가. 여행길에서 들렀던 사찰에 서있는 탑들도 무심히 지나쳤다. 백제, 신라, 고려, 조선…. 천년에서 수 백 년 세월을 품은 탑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제대로 들어보려 하지 않았다. 우리나라에 탑이 참 많기도 하구나, 다시 생각하게 하는 책이 있다. ‘탑-선 채로 천년을 살면 무엇이 보일까’이다. 손묵광 사진가의 흑백사진과 이달균 시인의 시조로 탑의 세월을 담아낸 책이다. 사진과 문학 분야에서 각기 쌓아온 40년 이상 내공을 책에 고스란히 쏟았다. 두 저자를 경남 밀양에서 만났다.
■사진가와 시인이 반한 탑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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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남 밀양 소태리 오층석탑을 배경으로 손묵광(왼쪽) 사진가와 이달균 시인이 서 있다. |
손묵광 사진가는 1956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사진을 전공했고, 국내외 공모전에서 100회 이상 수상했다. 이달균 시인은 1957년 경남 함안에서 태어났다. 1987년 시집 ‘남해행’과 무크지 ‘지평’으로 등단했다. 밀양역에서 두 저자를 만났다. 먼저 탑을 찾아다니기 시작한 사람은 손묵광 사진가이다. “몇 년 전 한 도시에서 아마추어 사진 동호회가 백제의 탑을 주제로 한 사진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전 일이 있어 가보지 못하고, 후배에게 들었습니다. 탑을 찍은 사진들이 탑의 조형미를 제대로 담지 못해 실망했다구요. 그 이야기를 듣고 직접 탑을 찍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부터 탑을 찾아다니기 시작했지요.”
이달균 시인은 그 사실을 좀 늦게 알았다. “손 사진가를 찾을 때마다 집에 없더라구요. 매번 강원도다, 전라도다, 산이다, 절이다 하는데 도대체 뭐하고 다니는지 궁금했어요. 탑 사진을 찍으러 다녔다는 겁니다. 그 탑 사랑이 저한테도 전염됐습니다. 함께 탑을 보면서 뭉클한 감동을 느꼈습니다. 천년 세월이 지나가는 동안 우리 역사를 묵묵히 지켜본 탑이 가슴에 들어왔지요.”
두 저자와 밀양에 있는 3기의 탑을 차례로 보았다. 숭진리 삼층석탑(보물 제468호. 고려 중기)은 숭진사 옛 터인 밭 한가운데 서 있다. 목탁소리를 내는 경석으로 유명한 만어사의 삼층석탑(보물 제466호, 고려 중기)을 본 뒤에는 눈 아래 펼쳐지는 시원한 녹음까지 선물 받았다. 그늘막 평상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보는 밀양 소태리 오층석탑(보물 제 312호. 고려 예종)은 운치가 있었다. 몇 시간 만에 천년 세월의 탑 3기를 보고 나니, 세월의 무게가 느껴져 어질어질했다.
■가장 아름다운 순간의 탑 사진과 탑에 바쳐진 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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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탑-선 채로 천년을 살면 무엇이 보일까 - 손묵광 사진가·이달균 시인·2019 |
손묵광 사진가는 “우리나라에는 1000기 이상의 탑이 있고,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것만도 400~500기에 이른다. 사람이 있는 곳에 탑이 있는 ‘석탑의 나라’였다”고 말했다. “중국은 벽돌을 쌓은 전탑, 일본은 목탑. 우리나라는 화강암이 많아 석탑을 세웠습니다. 바위를 정으로 쪼았던 석공들의 손길, 탑을 향해 발원하는 백성들의 마음, 탑과 함께 한 역사…. 절은 사라져도 탑은 남아있습니다. 천년 세월동안 이 땅에서 여러 왕조가 일어섰다 무너지는 걸 보았겠지요. 전쟁과 화재와 자연재해도 백성들과 함께 겪었고요.” 그는 돌의 질감과 명암을 제대로 담아내기 위해 흑백사진을 찍었다. 흑백사진이 컬러사진보다 명암이며 색 분해가 더 섬세하기 때문이다. 탑의 조형미와 세월을 포착하자면 계절과 밤낮, 주변 환경도 중요했다. “주소를 들고 찾아가보면 동네 사람들도 정확한 위치를 몰라 산 속을 헤매다 위험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설악산 봉정암 오층석탑은 일곱 번 올라가서 찍었습니다. 하지만 원하는 사진을 찍을 수 있었던 것은 단 10분이었지요.” 은은한 달빛과 환한 햇빛 아래, 흘러가는 운무 속에, 설경 속에…. 손묵광 사진 속의 탑은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서 있다. 같은 자리에서 사진을 찍어보고 싶다. 하지만 그때 그 순간을 만나려면 사진가처럼 수 년, 수차례 같은 길을 걸어야 한다니 엄두가 안 난다. 책을 보는 내내 큰 사진으로 볼 수 있는 전시회가 아쉬웠다.
이달균 시인은 “탑 기행은 역사여행”이라고 설명했다. “감은사지 탑과 무장사지 탑은 사라진 사찰인 감은사와 무장사의 흔적을 말해줍니다. 그 탑은 과거 역사인물들과 왕조의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어요. 문무왕은 3국을 통일하고, 당나라를 몰아내면서 대업을 완수했지요. 문무왕은 나라의 안녕을 위해 죽어서 용이 되고 싶다고 했고, 신문왕은 그 유지를 받들어 동해 바다 바위틈에 왕을 묻고 감은사를 창건했습니다. 문무왕의 선왕인 태종무열왕은 깊은 골짜기에 투구를 묻고 병장기를 감췄으며 그 절 이름을 무장사(鍪藏寺)라 했다는 설화가 전해집니다. 감은사지 탑, 무장사지 탑은 문무왕과 태종무열왕의 호국정신을 기리는 산 유적입니다. 사찰은 없어졌고, 그 사연들마저 몇 줄의 글로 남아 있어요. 하지만 탑은 남아서 선 채로 천 년 전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탑을 보면서 역사여행을 할 수 있어 많은 보람을 느꼈습니다.” 시인은 탑을 기록하기 위해 시조를 선택했다. “천년 탑을 글로 남기자면 700년 역사의 전통시조가 딱 어울리지요. 책에 소개된 탑 70기에 시조 한 수씩 바쳤습니다.” 어찌 보면 그 탑이 그 탑 같은데, 탑마다 시조로 노래했다니 보통 애정이 아니다.
두 사람은 만나기만 하면 탑 이야기만 한다. 취재를 하러간 필자도 어느새 본분을 잊고 이야기에 푹 빠져들었다. 책을 봐도 그렇고, 대화를 들어봐도 그렇고 ‘이 두 사람은 탑에 미쳤구나’ 싶다. 수년간의 정성과 경비를 생각해보면 그 열정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이 땅의 탑을 기록하는 역사 프로젝트로 진행됐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천년이라니. 그게 어디 보통 세월인가. 세월은 지금 이 순간에도 흘러가고, 탑 기행은 현재진행형이다. 책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