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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주의 그곳에서 만난 책 <85> 이중기 시인의 ‘어처구니는 나무로 만든다’

농사 짓는 시인… 봉인된 민초들의 죽음, 시로 위로하다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20-07-05 18:59:04
  •  |   본지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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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향 영천서 학생시절부터
- 낮엔 농사 짓고 밤엔 시 지어
- 이 땅 농민들 분노 많이 써와

- 1946년 10월 영천항쟁·민중사
- '눈 철벽 귀 철벽 입 철벽'하며
- 살아남은 자들의 증언 채록

- 시집 '시월''영천아리랑' 등에
- 기록되지 않은 역사 오롯이 담아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역사의 한 장면을 만날 때면 흠칫 놀란다. 미처 몰랐던 잘못을 들켜버린 생각이 든다. 광복과 한국전쟁 당시의 혼란으로 무고하게 희생당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다. 기념일 때마다 묻혀버린 역사를 한번쯤 끄집어내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그런데도 우리는 무심하다. 역사책에 기록되지 않아 배우지 못했다는 변명을 해보긴 하지만, 막상 그 무관심을 들켜버렸을 때는 부끄럽다.

‘그때 그 사람들’에게 닥친 진실을 아는 것만도 적잖이 괴로운데, 역사를 찾아 다시 기록하는 일은 얼마나 힘이 들까.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말을 믿지 않으며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살아남은 증언자들을 만나는 일은 얼마나 아플까. 이중기 시인은 1946년 10월의 영천 항쟁과, 영천 근현대 민중사를 시로 썼다. 경상북도 영천시에서 시인을 만났다.
1946년 10월의 영천 항쟁과 영천 근현대 민중사를 시로 쓴 이중기 시인이 영천 창구동 조선시대 누각인 ‘조양각’ 앞에 서 있다,
■농사도 시도 몸으로 하는 일

복숭아 농사를 짓는 이중기 시인과 약속을 정할 때 시인이 말했다. “일기예보를 보니 며칠 후 비가 온대요. 비가 오면 농사일을 못하니, 그날 만나지요.” 그런데, 아뿔싸. 약속한 그날, 부산도 영천도 햇빛이 기세 좋게 뜨겁기만 했다. 일조량이 풍부해 복숭아와 포도로 유명한 영천의 햇빛을 양껏 받았다.

이중기는 1957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났다. 1992년 ‘창작과비평’ 가을호에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식민지 농민’ ‘숨어서 피는 꽃’ ‘밥상 위의 안부’ ‘다시 격문을 쓴다’ ‘오래된 책’ ‘시월’ ‘영천아리랑’ ‘어처구니는 나무로 만든다’ 등의 시집을 냈다. 일제강점기 작가 백신애의 작품과 생애를 추적한 ‘방랑자 백신애 추적보고서’와 ‘원본 백신애 전집’을 엮었다. 제1회 작가정신문학상을 수상했다.

이중기는 열네 살 때부터 농사를 짓고, 고등학교 때부터 시를 써 왔다.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이면 시를 짓는 시인을 만나니, ‘주경야독’이라는 고사성어가 떠오른다. 그는 “농사도 시도 몸으로 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농사도 짓는 것, 시도 짓는 것. 이중기는 어쩌면 하나의 세상을 짓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시에는 이 땅 농민들의 분노를 담은 시들이 많다. 그러다 최근 10여 년 동안 자신이 살고 있는 영천의 역사와 사람들의 이야기를 시로 썼다. ‘시월’ ‘영천아리랑’ ‘어처구니는 나무로 만든다’ 세 권의 시집이다. ‘시월’은 1946년 10월의 영천 항쟁을 기록한 민중서사시, ‘영천아리랑’은 영천의 특이한 인물들을 그린 만인보, ‘어처구니는 나무로 만든다’는 그 시절 영천 민초들의 절박했던 삶을 담았다.

■살아남았으되, 죽음을 설명하지 못하는 한

어처구니는 나무로 만든다- 이중기 시집, 한티재, 2018
“농민운동을 하다가 영천의 한 어르신께 영천 항쟁과 당시의 이야기를 들었어요, 내가 태어나 살고 있는 땅에서 일어났던 비극을 알게 된 거죠.” 그때부터 시인은 영천지역의 10월 항쟁 관련 자료를 조사하고 채록했다. 시인과 함께 임고면 선원리 아작골과 임고강변공원에 세워진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위령탑을 보았다. “원래 이름이 절골인데, 지금은 아작골이라고 더 많이 부르죠. 수많은 민간인들이 ‘아작’난 원한이 사무쳐있습니다. 오죽했으면 아작골일까요, 임고강의 위령탑은 2018년에 세워졌어요.”

위령탑 옆에는 희생자 520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위령탑 건립문에서 “1946년 부당한 보리 강제공출 행위에 시달리며 정당한 농지개혁을 외쳤던 10월항쟁 희생자 47명. 1949년 좌익세력 사상을 개조한다는 명목으로 무고한 양민들을 희생시킨 국민보도연맹 희생자 260명, 1948년부터 1950년까지 적법절차 없이 학살된 희생자 219명”이라는 대목을 읽은 뒤, 희생자들의 이름을 보니 가슴이 먹먹하다. “광복직후 우리나라에는 풍년이 들었는데 국민은 굶주렸어요. 혼란한 시기에 쌀을 빼돌려 일본에 팔고 이것을 묵인한 위정자들이 있었지요. 보리마저 강제공출당하면 굶어죽게 생겼는데 가만히 있을 수 있었겠어요.”

시인의 이야기는 10월 항쟁 당시 절박함과 분노에 찬 농민들에 의해 불태워진 당시 군청과 경찰서가 있던 곳에서 계속됐다. 현재의 영천 창구동이다. 건너편에는 조선시대 누각인 조양각이 있다. 조양각 그늘에서 보이는 오늘날의 건물들은 그날의 일을 알고 있을까. 자식과 부모형제의 입에 들어갈 보리를 지키고자 했던 사람들, 한국전쟁 전후로 이념이 뭔지도 모르는 채 좌익으로 내몰려 죽어간 사람들의 억울한 사연은 어떻게 풀어야 하는 걸까.

시인은 당시의 일을 목격한 사람들을 찾아 영천 곳곳을 다녔다. “여든이 넘은 어르신들을 만나 구술 작업을 시작했을 때, 술벼락 물벼락 많이 맞았죠. ‘뭐하는 놈이냐, 그런 걸 왜 물어보냐’는 반응이었어요. 지금도, 누구도, 그 일을 제대로 이야기 못합니다. 혹시라도 빨갱이라고 낙인이 찍힐까 봐 여전히 두려운 겁니다.”

그렇게 한 마디 한 마디 채록한 이야기들이 세 권의 시집에 담겼고, 또 한 권 분량의 시들이 쌓여있다. 시집 ‘어처구니는 나무로 만든다’를 읽는 것은 나라의 운명에 휘말려 희생된 사람들의 삶을 아프게 만나는 일이다. 시 ‘곽끝자 할매 생전에 했던 말’의 마지막 구절 “보소,/ 이 말, 내 입으로 뱉았다고는 하지 마소”에는 살아남았으되, 죽음을 설명하지 못하는 한이 서려있다.

시 ‘선언’에는 그 이야기를 찾아다닌 이중기 시인의 마음이 담겨 있다. “눈 철벽 귀 철벽 입 철벽 기밀보관소가 있다/ 먼지 켜켜이 쌓인 입 철벽에 봉인된 죽음이 있다/ 그들이 죽음으로 쌓은 성채 앞에서/ 능멸을 참은 고스란히 칠십 년 풍상 홀로 높아 제문조차 숨어 그리 핍진하게 써야 했던 벼랑의 날들/ 치명의 죄 지독하게 뒤집어 쓴 시월은 고유명사다/ 가시면류관을 벗어도 좋은 근사한 시절이 왔다고 구름에게 말하지 마라/ 하늘 벼랑 달리던 새들이 남긴 발자국 봐라/ 마지막 한 오라기 남루조차 벗어던지고 시월은 절대고유명사다”

이 시를 읽으면서 생각한다. 언제쯤 우리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고 말하게 될까. 책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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