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업 작가 아닌 공학박사 직장인
- 역사소설 쓰기위해 자료 찾다가
- 18세기 전 ‘한국의 괴물’에 빠져
- 고려사절요에 기록된 ‘용손’
- 어우야담 속 ‘강원도 인어’ 등
- 구전되거나 모호한 이야기 아닌
- 실제 문서 남겨진 괴물만 다뤄
- 13년간 인터넷 블로그에 공유
- “창작자에 도움됐음 하는 바람”
이 땅에 괴물이 이렇게 많단 말인가. 흠칫 놀랐다. 그냥 괴물백과도 아니고 ‘한국’이라는 단어가 붙어있으니 그럴 수밖에. 괴물이나 요괴에 대한 책이 더러 있긴 했지만, 이 책은 뭔가 다르구나 싶었다. 백과라는 형식에 맞게 괴물들이 가나순으로 소개돼있다. 게다가 모든 항목에 ‘출전’이 밝혀져 있었다(!) 상상으로 만들어낸 괴물이 아니라 출전이 있다는 게 흥미를 끌었다. ‘용재총화’ ‘어우야담’ ‘삼국사기’ ‘삼국유사’ ‘동문선’ ‘대동야승’ 등의 문헌과 괴물이 출현한 지역도 밝혀져 있다. 논문을 쓸 때 참고문헌을 밝히는 형식이다. 책을 빠르게 넘기는데 눈에 확 들어오는 문장이 있었다. “조선 시대에 신숙주가 젊은 시절에 보았다 한다.” 신숙주라니. 우리가 아는 그 신숙주가 ‘장구당로’라는 괴물을 본 경험이 어우야담에 실려 있단다. 신기하고 재미있는 책이다. 괴물을 찾아 기록한 곽재식 작가를 서울 역삼동에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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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괴물 백과’를 쓴 곽재식 공학박사 겸 작가가 서울 강남구 역삼동 테헤란로를 걷고 있다. |
■역사소설 자료조사에서 시작된 괴물 찾기
곽재식은 1982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2006년 단편소설 ‘토끼의 아리아’가 TV 드라마로 방영되면서 SF 작가로 활동을 시작했다. ‘미스테리아’ ‘과학동아’ 등 다양한 매체에 글을 쓰고 있다. 그가 하는 가장 중요하고 재미난 활동이 2007년부터 한국의 옛 기록에 등장하는 괴물 이야기를 정리해온 것이다. 괴물을 소개하는 블로그 ‘괴물 백과사전’도 운영하고 있다. 이 블로그는 민속학 연구자, 소설가, 게임 및 웹툰 시나리오 작가, 졸업 작품을 준비하는 학생들에게 참고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저자가 찾아낸 괴물이 다양한 장르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재탄생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블로그는 일명 ‘온라인 괴물 소굴’로도 불린다. 책 ‘한국 괴물 백과’는 282종의 괴물을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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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괴물 백과에 소개된 ‘지봉유설’ 속 괴물 ‘가사어’. 이강훈, 워크룸프레스 제공 |
책을 보면서 그가 전업 작가가 아닐까 짐작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공학박사에요. 회사가 테헤란로에 있어요.” 커피숍에서 만났을 때, 미리 기다리고 있던 그는 탁자 위에 노트북을 놓고 들여다보고 있었다. 점심시간이라 주위에는 식사 후 커피를 마시러 온 직장인들이 많았다. 그러고 보니 그가 점심시간을 고스란히 취재를 위해 내준 셈이다.
책의 서문에 왜 이 책을 썼는지 상세하게 밝히고 있어 딱히 물어볼 것도 없었다. 그저 작가의 얼굴을 꼭 한번 보고 싶어서 만났다는 게 솔직한 이유다. ‘한국 괴물 백과’를 쓴 ‘괴물’이 궁금했다는 게 맞겠다. 서문을 읽은 느낌을 말했더니 곽재식도 고개를 끄덕였다. “괴물 이야기를 블로그에 올리는 동안 사람들이 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어떻게 하고 있느냐는 질문을 해왔어요. 그 질문들에 대한 답이죠.” 그렇다면 책의 서문은 그동안 쌓인 질문과 답의 합체인 셈이다.
괴물을 찾는 일은 특별한 사명감 같은 것으로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그저 옛날을 배경으로 한 역사 소설을 써보기 위해 자료 조사차 시작한 일이었다. 사극이나 영화를 통해 알려진 모습이 아니라 진짜 옛날 사람들이 남긴 진짜 옛날이야기가 무엇인지 알고 싶을 뿐이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생각하는 ‘구미호’는 TV 드라마가 보여준 모습이라는 것이다.
■선조들이 남긴 기록 속의 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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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괴물 백과-
곽재식 지음·이강훈 그림, 워크룸프레스, 2018 |
책 속 괴물들은 곽재식이 모두 옛 문헌에서 찾아낸 기록이다. 그는 18세기 이전의 문헌에 남아 있는 각종 괴물을 정리했다. 따라서 19세기 이후에 기록된 괴물, 작자가 불분명한 문헌에 기록된 괴물, 소설 속에만 등장하는 괴물, 기록 없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온 괴물 등등은 모두 배제했다. 현대에 조사된 소문, 전설, 풍습에 등장하는 괴물도 다루지 않는다. 괴물을 소개할 때도 되도록 자의적 해석을 배제했다. 괴물의 이름이 불분명한 경우, 괴물이 기록된 문헌의 특징적 구절을 이름으로 삼았다. 설명할 때는 괴물이 기록된 문헌이나 괴물을 묘사한 전통공예품 등을 참고했다.
책에서 괴물 하나를 만나보자. 어우야담에는 강원도 통천에서 ‘인어’가 발견됐다는 기록이 있다. “헤엄치는 모습은 거북 같지만, 사람과 닮은 점도 있다. 앉았을 때의 옆모습은 사람과 똑같다. 머리칼은 금발과 흑발이 섞였고 눈동자는 밝은 황색이다. (중략) 기름을 짜 먹어보면 무척 맛있고 오랫동안 상하지 않아 고래기름보다 더 귀한 것으로 친다. 조선 시대에 김덕령이 지금의 통천에서 어부가 잡은 것을 빼앗아 놓아주었다.” 조선 시대 김덕령, 강원도 통천…. 몇 년 전에 방영된 드라마 ‘푸른 바다의 전설’이 어우야담 속 인어 이야기를 모티브로 만들었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어우야담의 인어 말고도 우리 옛 문헌 속에 기록된 괴물들은 또 어떤 것이 있을까.
선조들이 남긴 기록 속의 이야기를 찾아 새롭게 재현하고 싶어 하는 창작자들은 많다. 곽재식 작가는 창작자에게 도움이 되는 자료들을 모으고, 공유하고자 한다. ‘고려사절요’에 기록된 괴물 ‘용손’은 용과 사람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몸 어딘가에 비늘이 있다. 곽재식은 용손을 소개하며 이런 말을 덧붙였다. “용손이 대대로 정체를 숨기고 살았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물에 빠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능력을 발휘하는 이야기나 용손이 정체를 숨기고 잠수사나 수영 선수로 성공하는 이야기도 상상해볼 만하다.” 괴물을 소개하며 곽재식은 이런 식으로 유혹한다.
그가 틈틈이 괴물을 찾고, 소개하고, 공유하는 일이 올해로 어느새 13년째이다. 새로운 고문서가 나타났다는 소식이 들리면 혹시 그 안에 괴물이 있을까 솔깃해진다는 그의 괴물 찾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는 책에서 ‘괴물’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옛 기록에도 쓰면서 현재에도 큰 의미 차이 없이 그대로 쓰는 말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괴물보다 한국학이라는 데에 방점을 찍고 싶은 이 책을 읽는 동안 선조들이 두려워하고, 혹은 마음을 기댔던 괴물의 세계에 푹 빠질 수 있었다. 어쩐지 더위가 달아나는 기분이다. 책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