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잃는 것은 인간의 생을 지속시키는 중요하고 필요한 일이지만, 절대로 잊히면 안 되는 기억들도 있어요. 그런 기억들이 머물다 간 어떤 시간, 또 그 속에서 고독하고 힘들게 헤엄쳐나가는 여성들에 관해 쓰고 싶었어요.”

박향(57·사진) 소설가가 단편집 ‘좋은 여자들’(강 출판사)을 펴냈다. 박 작가는 2년 전 장편소설 ‘파도가 무엇을 가져올지 누가 알겠어’를 냈으며, 단편집은 2012년 ‘즐거운 게임’ 이후 8년 만이다.

‘좋은 여자들’은 2014년부터 올봄까지 발표한 8편의 단편으로 엮었다. 저마다 ‘어떤 사건’ 속에서 고통받은 여성이 등장한다. 이들의 아픔에는 필연적으로 고독이 따른다.

박 작가는 “일부러 여성들에게 집중했다기보다는 2014년께부터 여성과 관련된 사회적 사건이나 운동이 많아지고 미투 운동도 등장해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졌다”고 말했다.

수록 작품 ‘사레’는 과거 상처를 현재의 것으로 느끼는 아내와 그렇지 않은 남편의 간극을 그린다. 부부에게는 학교폭력 피해자였던 딸이 있다. 아내는 세월호 참사를 보면서도 “민아가 외롭게 혼자서 숨을 헐떡이며 힘겹게 헤치고 나갔을 시간들을 생각(65쪽)”하지만 남편은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체인징 파트너’의 은주는 직장 동료 철수와 보낸 하룻밤에서 찍힌 알몸 ‘몰카’가 사내에 유포되면서 나락으로 떨어진다. 동료들의 폭력적인 시선과 행동, 철수와 결혼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속수무책 전개 속에서 은주는 결국 체념에 이른다. “죽음이든 결혼이든 의미 없어. 어느 것이든 나에겐 똑같아.”(247쪽)

어떤 고통은 ‘망각’함으로써 오히려 선명하게 전달된다. ‘좋은 여자’의 수경은 동성애자였던 남편이 스스로 목숨을 끊기 전 자신과 나눴던 이야기를 기억하지 못한다. 남편이 죽던 순간을 전혀 떠올리지 못하는 건 ‘시집 읽기’의 영란도 마찬가지다. 학교폭력으로 자살한 아들의 삶을 추적하다 몸과 정신 모두 만신창이가 된 남편은 스스로 방에 지른 불로 생을 마감한다. 영란은 직접 장례까지 치러냈지만, 남편의 마지막 모습은 “블랙홀 같은 구멍”(95쪽)처럼 머릿속에서 사라진다.

소설 속 고통이 그저 상처로만 남는 건 아니다. ‘죽은 자들의 도시’ ‘시집 읽기’는 그런 경험이 또 다른 누군가의 상처를 민감하게 알아채고, 가여워하고, 위로하는 원동력이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박 작가는 1994년 부산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2005년 ‘영화 세 편을 보다’를 시작으로 ’얼음꽃을 삼킨 아이’‘카페 폴인러브’ 등을 펴냈다. 제9회 세계문학상 대상, 제5회 현진건문학상 대상, 제3회 부산소설문학상, 제12회 부산작가상을 받았다.

민경진 기자 jnmin@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