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사랑 점심시간 때 노랫말 구상
- 박시춘 기타 쳐가며 악보 다듬고
- 현인 오후 내 새 창법으로 연습
- 다방에 방음 장치하고 녹음 몰두
- 다음날 동틀 무렵 명곡은 완성돼
- 6·25 전쟁 직후 부산 중심배경
- 흥남철수로 인한 1·4후퇴 과정
- 그 속 주민들의 삶 생생히 묘사
1950년대 초반 6·25전쟁 직후의 피폐한 현실과 민족의 내면 풍경을 가장 극적으로 묘사해 대중들의 심금을 울렸던 노래 하나가 있다. 바로 ‘굳세어라 금순아’(강사랑 작사, 박시춘 작곡, 현인 노래)이다. 작사가 강사랑의 노랫말과 작곡가 박시춘의 작곡이 잘 어우러져 이 가요작품의 효과를 극대화했다. 가수 현인의 독특한 창법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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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도대교의 현인노래비. |
이 작품의 노랫말에는 전쟁 중 돌연한 중공군 개입으로 북한주민들이 대거 월남하게 되는 흥남철수, 그로 인한 1·4후퇴의 총체적 과정이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이와 더불어 가족이산의 처절한 슬픔과 낯선 타향에서 노점 상인으로 전락한 월남 실향민들의 가련한 처지까지 묘사되어 있다. 가족의 결속과 북진통일, 고향 회복의 꿈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으로 전개되는 작품 내부의 정황들이 1950년대 당시 주민들의 내면 풍경과 완벽하게 합일되고 있다. 이 음반의 제작은 단 하루, 그것도 자정을 넘긴 새벽 시간에 모두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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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도대교 부근의 점집. |
전력 사정이 워낙 열악하던 1950년대 초반, 오리엔트레코드사에서는 1개월에 약 10장 정도의 음반을 겨우 제작하는 형편이었다. 레코드사 대표인 작곡가 이병주, 문예부장인 작곡가 박시춘, 작사가 강사랑 등 3인은 박시춘의 부인이 운영하던 오리엔트 다방에서 다음 음반 제작에 대해 의논하고 있었다. 마침 점심시간이어서 셋은 단골 냉면집으로 가던 중이었다. 월남 실향민들이 노점상을 하고 있는 양키시장(지금의 교동시장) 좌판대 앞을 지나다가 강사랑은 문득 작품의 착상을 얻었다. 실제로 그 무렵 강사랑은 부산 국제시장에서 구제품 옷 장사를 하다가 대구로 옮겨온 금순이라는 처녀와 사귀고 있었다. 식당에 도착하는 동안 길에서 1절을 구상했고, 식사를 마치고 돌아온 즉시 전체 가사형태를 정리해서 그 메모를 작곡가 박시춘에게 보여주었다. 박시춘은 원고를 보자마자 감흥이 솟구쳐 기타를 연주해가며 악보를 다듬었다. 이 악보를 가수 현인에게 주며 오후 내내 연습을 시켰다. 일본 우에노 음악대학을 졸업한 현인은 손쉽게 악보를 읽고 창법을 개발했다. 그날 밤 자정이 지나 평소 녹음실로 사용하던 오리엔트다방에서 늘 그렇듯 창문에 군용담요를 여러 겹 둘러쳐 방음장치를 했다. 이렇게 녹음을 시작하여 날이 샐 무렵 완성을 앞둔 시간이었다. 연주자들과 음반제작자들은 모두 비좁은 공간에서 꼬박 밤을 샌 것이다. 통행 금지가 해제되기 직전, 마침 골목을 지나가던 두부 장수의 종소리가 끝부분에 고스란히 녹음되고 말았다. 제작진은 어쩔 수 없이 원판을 버리고 다음 날 새로 취입할 수밖에 없었다. 생전에 필자와 친밀하게 지냈던 이병주 선생의 증언이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디로 가고 길을 잃고 헤매었더냐/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 이후 나 홀로 왔다
일가친척 없는 몸이 지금은 무엇을 하나/ 이 내 몸은 국제시장 장사치기다/ 금순아 보고 싶구나 고향 꿈도 그리워진다/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
철의 장막 모진 설움 받고서 살아를 간들/ 천지간에 너와 난데 변함 있으랴/ 금순아 굳세어다오 북진통일 그 날이 되면/ 손을 잡고 울어보자 얼싸안고 춤도 추어보자
(‘굳세어라 금순아’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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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수 현인의 바이닐 음반 표지(왼쪽 사진)와 라벨. |
이렇게 제작 발매된 ‘굳세어라 금순아’는 곧장 대중들의 폭발적 반응을 얻었다. 전쟁 중 경제가 몹시 열악하던 시절에 약 1만 장 넘는 매상 실적을 올렸다는 사실은 이 가요작품의 특별했던 대중적 인기도를 말해준다고 할 것이다. 국밥 한 그릇이 5000환이었을 때 음반 한 장 가격은 5만 환으로 쌀 한 말값과 같았다고 한다. 과연 다음날부터 길거리에서 청년들이 이 노래를 부르며 몰려다니기 시작했다. 워낙 히트곡이었던지라 이런 곡절까지 있었다. 보안당국에서 음반 판매금지 통보와 함께 호출 명령이 날아온 것이다. 음반 제작자들은 모두 지정된 곳으로 출두했다. 가보니 평소 가요팬으로 자처하며 찾아와 자주 어울리던 낯익은 사람이 군복을 입고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간 사복을 입고 자신의 신분을 위장했던 것이다.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승달만 외로이 떴다’에서 ‘왜 달이 영도다리 난간 위에 아슬아슬 떴다고 표현했느냐’ ‘어찌 보름달이 아니고 초승달이냐’ ‘초승달을 외롭게 떴다고 한 까닭이 무엇인가’ 따위가 추궁의 핵심이자 초점이었다. 이렇게 된 속사정에는 작사가 강사랑의 사상적 전력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전남 여수 출생의 강사랑은 여순사건의 주모자였던 처남과 연결이 되어 여러 해 동안 줄곧 은밀한 감시를 받던 중이었다. 평소 자주 어울리던 그 가요팬도 사실상 강사랑을 감시하던 군 보안요원이었던 것이다. 아무튼, 여러 날 고초를 겪은 뒤 이 음반에 대한 판매금지는 풀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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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은 비록 대구에서 제작 발매되었지만 이 가사에는 부산이 중심배경으로 등장하고 있다. 이 노래의 시적 화자는 북에서 피난 내려온 청년이다. 누이동생 금순이를 사뭇 애절하게 떠올린다. 1절은 흥남부두에서의 가족 이산, 2절은 부산으로 피난 내려 온 뒤 외톨이로 국제시장 노점상이 된 하루살이의 처연한 신세, 3절에서는 흩어진 가족이 반드시 상봉하여 고향으로 되돌아갈 것이라는 다짐 등이 절절하게 담겨 있다. 전쟁 시절 피난지 임시수도였던 항도 부산의 전형적 풍경과 그 어디에도 심신을 의탁할 길 없었던 월남 실향민의 애환과 내면 풍경을 이렇게 잘 반영한 노래도 그리 많지 않다. 영도다리 난간 위로 뜬 초승달의 풍경이 새삼 애처롭게 느껴지는 주옥같은 명편이자 절창이 아닐 수 없다. 부산 시내에서 영도대교를 건너자마자 오른편에 영도 출신의 가수 현인의 좌상이 보인다. 노래비에는 이 ‘굳세어라 금순아’가 새겨져 있다. 노래비는 바다와 항구가 어우러진 선박의 형상이다. 음반, 음표, 파도 등의 이미지를 적절히 배합한 노래비로 부산의 상징적 명소 중 하나가 되었다. 외지에서 온 관광객들이 이 노래비 앞에 머물러 ‘굳세어라 금순아’를 부르는 광경을 자주 볼 수 있다. 시인·가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