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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국과 함께하는 명작 고전 산책 <1> 춘향전(무명씨)

양반 위선 걷어찬 춘향 … 그 통쾌함에 선조들 각색한 책만 120여 종

  • 서부국 국장 겸 교열부장
  •  |   입력 : 2020-08-31 19:34:57
  •  |   본지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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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급사회 풍자·해학 고전 최고봉
- 백성들 필사로 당대 민심 반영
- 큰 줄거리 같지만 세부내용 다른
- 방대한 양의 ‘이본’ 재생산시켜

- 신분상승의 욕구·자유연애관 등
- 조선 사회 다양한 욕망 보여줘
- 주체적 여성 ‘페미니즘’도 엿봐

- 영호남 뿌리 깊은 반감의 흔적
- 그 당시 ‘한양 일극주의’도 묘사

세계는 가본 적 없는 ‘코로나 터널’을 힘겹게 통과하는 중입니다. 인류가 이룬 첨단 이기들조차 속수무책이죠. 받아들 미래가 두렵습니다. 일상은 흔들리고 고통은 증가합니다. 귀한 생명이 꺼져 갑니다. 그럴수록 올바른 선택을 향한 갈증에 속이 탑니다. 선인은 “책 속에서 길을 찾으라”고 했습니다. 실내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진 요즘, 동서고금 명저를 읽으며 삶을 응시하는 시력을 높여 보는 건 어떠한지요.
   
독자 박용칠 씨가 제공한 광한루 전경 사진으로, 성춘향 이몽룡이 첫 만남을 이룬 작품 속 주요 공간이다. 보물 제231호.
춘향전(春香傳)은 위험한 책이다. 우리나라 대표 고전이라며 권독했을 때 상대방이 발칵 역정을 낼 확률이 아주 높아서 그렇다. “아, 내용을 다 아는디 뭐땀시 그라요?” 읽어 본 이는 물러서지 않는다. “테레비에서 본 게 다가 아니랑께.” 귀를 기울였던 상대가 춘향전을 읽게 됐다면? ‘테레비 춘향’은 망막을 떠나 사라진다. 책을 읽은 이는 알까. 춘향전이 우리 문학 성좌에서 첫 번째로 빛나는 별임을.

이 고전, 머리 싸매고 읽지 않아도 된다. 만남 이별 재회라는 간결한 전개, 선(善)이 완승하는 해피엔딩 구도는 통쾌하다. 원작자를 모르는, 조선 숙종 이후 탄생한 춘향전이 우리나라 고전 중 가치를 따졌을 때 단연 앞자리를 차지하는 저력은 어디서 나올까. 우선, 문학 성과가 압권이다. 이본(異本, 기본 줄거리는 비슷하면서 세부 내용이 다른 책)이 120여 종에 이른다.백 가지 얼굴을 가진 한국 고전계 여신. 한국 전승설화→판소리→소설→공연·영상물 순으로 장르가 근현대를 좇아 성장해 ‘춘향 종합 예술’로 자리 잡았다. 재생산 맥박이 힘차다. 창극 영화 오페라 연극 뮤지컬 같은 다양한 장르에서 환영받는 ‘국민 문학 작품’이다. 춘향전은 ‘카르멘’처럼 세계무대에서 주목받을 우리 문화 인프라임을 잊어선 안 된다.

이본이 많다는 건 개작이 많았다는 뜻. 인쇄술이 보급되기 전에는 책 필사(筆寫)가 흔했다. 베껴 쓰다 보면 새 내용이 끼어들거나, 당대 민심이나 사회상이 반영되기도 했다. 춘향전 작가는 온 백성이라는 얘기가 허풍이 아니다. 이런 고전은 서양에도 없다. 춘향전은 익살소설. 땅이 꺼져도 웃을 줄 아는 멋진 우리 선인이 배우로 등장한다. 웃는 민족은 강하다. 근엄하고 무게 잡는 양민은 없다. 위선을 걷어찬다. 이본 속 춘향은 단아하기는커녕 아주 욕쟁이다. 몽룡은 좀 모자란 양반 도령 그 자체다. 제 욕심 차리느라 몸종 방자와 너나들이를 불사한다. 암행어사로 출두하기 전 거지 행색인 자신을 홀대한 기생에 앙심을 품는다. 명색이 어사인데! 그런데 어쩐지 정이 간다.

   
현대의 공연물로 재탄생한 ‘춘향전’의 한 장면.
못난 수령 변학도는 애처롭다. 몽룡과 백년가약을 맺은 춘향에게 수청을 강요했다가 말싸움에서 박살 났다.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이요, 열녀불경이부(烈女不更二夫)라 했더이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는다고 했거늘 백성 지아비인 수령께서 어찌 수청을 들라 합니까.” 춘향 논리에 반박할 틈이 없다. 조선 제일 통치 이데올로기이자 윤리 덕목을 부정하는 순간 천하 개차반이 될 판이다. 똑똑한 춘향. 열녀 이데올로기를 멋지게 이용해 심신을 지켰다. 변학도는 적당한 욕망은 인생에 활력을 주지만 제어 못 하면 제 무덤을 파게 된다는 교훈을 증명한 인물이다. 춘향전에는 당대 사회 병폐를 풍자하는 대목이 많다. 고단한 삶을 웃음으로 달래야 했던 백성이 떠올라 가슴이 짠해진다. 조선은 철저한 계급 사회였다. 양반과 상민 간 긴장을 줄이는 완충재가 필요했다. 위선에 익숙한 양반계급을 그려 평민 속을 확 뚫었다. 지배계급 역시 사회 불만을 순치하는 효과를 노려 발칙한 춘향전을 묵과했다. 이 고전은 조선 후기 사회에 흘렀던 차별 비리 욕망 절망을 복잡하지 않은 알레고리로 보여준다.

춘향전이 이룬 또 다른 문학 성과. 판소리계 소설이기에 문장에서 소리 없는 소리가 난다. 조선 후기(숙종 말~정조)에 불렸던 판소리 ‘춘향가’가 문자로 환생했기 때문이다. 활자는 음표다. 지면에 붙지 않고 튀어 오른다.

“춘향이가 그제야 못 이기는 모습으로 겨우 일어나 광한루 건너갈 제, 대명전 대들보의 명매기 걸음으로, 양지 마당의 씨암탉 걸음으로, 흰모래 바다의 금자라 걸음으로, 달 같은 태도 꽃다운 용모로 천천히 건너간다. 월나라 서시가 배우던 걸음걸이로 흐늘흐늘 건너온다.” (춘향전, 송성욱 풀어 옮김, 민음사)

춘삼월 광한루에서 그네를 뛰던 춘향을 보고 한눈에 반한 몽룡은 방자에게 그녀를 데려오라고 명한다. 박속 같은 흰 살결을 창공을 배경으로 내보인 춘향에 몽룡이 그만 눈멀었다. 춘향, 아장아장 다가간다, 예쁘장스레. 명매기(귀제비)걸음 씨암탉걸음 금자라걸음. 윤슬처럼 반짝이는 우리말이다. 현대 한글로 푼 춘향전에는 이처럼 조선 후기 전라지역 백성들이 사용했던 언어가 흐른다. 청처지다(아래쪽으로 살짝 늘어지다) 모모이(면면이) 날진(길들이지 않은 야생 매로 날지니 산지니로도 부름. 집에서 기르는 매는 수진 수지니 보라매) 엄급급여율령사파쐐(귀신을 쫓는 주문). 되살려내 지금부터라도 사용해봄 직하다.

춘향전은 속담도 새로이 만들어냈다. ‘춘향이가 인도환생(人道還生)을 했나’는 죽었던 춘향이 인간 세상에 다시 태어났느냐는 뜻인데 정절이 굳센 여인을 이른다. ‘춘향이네 집 가는 길 같다’는 찾아가는 길이 아주 복잡할 경우에 쓴다. 광한루에서 춘향을 만난 몽룡이 어디 사는지 묻자 춘향이 복잡하게 설명하는 대목에서 유래했다. 춘향전은 제목 그대로 춘향이 우위인 소설이다. 그녀가 몽룡을 선택했다. 첫날밤을 보내기 전 노래와 문답을 통해 몽룡 머릿속 무게를 재보고 배우자로 삼았다. 춘향은 페미니스트였다.

   
이 고전에는 영호남 반감이 지나간 흔적이 보인다. 이고본 춘향전(성현경 풀고 옮김, 보고사)이다. “사람이 나도 산세를 좇아 나느니라. 경상도는 산이 험준하여 사람이 나도 우악하고, 전라도는 산이 촉하기로 사람이 나면 재주 있고, 충청도는 산세가 유순하여 사람이 나면 유순하고, 경기도 삼각산은 범이 걸터앉고 용이 웅크린 산세라 사람이 나면 유순하고도 강직하니 ….” 방자가 춘향을 몽룡에게 데려가려고 겁주는 대목이다. 영남인을 대놓고 깎아내리면서 호남인은 치켜세웠다. 영호남을 가르는 지역주의 냄새가 난다. 언제부터 시작된 건지 뿌리도 깊다. 이 고사본(古寫本, 손으로 베껴 써 옛날부터 전해 오는 책) 원저자나 필사자가 전라도 출신임은 분명하다.

   
춘향전은 욕망이 가득한 인간을 은유하는 심리소설이다. 좋은 음식, 가구, 미인을 향한 사대부 욕구에 양반 신분을 얻으려는 질주, 봉건 체제 속 분출하는 대중 성욕, 충돌하는 정절 이데올로기와 자유 연애관, 경제력을 가진 중간 계층에 흔들리는 양반 신분제…. 지역 분권에 관심을 둔 독자는 수도 일극 체제를 잡아낸다. 몽룡과 백년가약을 맺은 춘향도 모진 형벌을 당한 후 칼을 쓰고 옥에 갇히자 오로지 ‘한양’만 바라본다. ‘한양댁’으로 신분을 끌어올려야 목숨을 부지하니 어쩌랴. 한양에서 서울로 지명만 바뀌었을 뿐 일극주의가 여전하니 개탄스럽다. 지금, 청년은 여건만 되면 지역을 떠난다. 춘향이 첫사랑을 지킨 대가로 한양 입성권을 얻고 정렬부인에 봉해져 육 남매를 낳아 명문 가문을 일군다는 ‘서울공화국 신화’는 그대로다. 춘향이 고향으로 돌아와 지역을 살리는 이본이 아쉽다. 춘향전은 지역 화두인 분권으로 시선을 돌리게 한다. 춘향전은 싫든 좋든, 바람직하든 않든 간에 그 속엔 이 땅 위에서 지금까지 이어지는 적나라한 우리 욕망을 주제로 삼았다. 그 모습이 무얼 뜻하는지 궁금하다면 춘향전을 펼쳐라. 국장 겸 교열부장


※ 이 시리즈는 격주 금요일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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