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구 부인사·동화사 승려의 항쟁
- 10여 년 지속 경주·운문의 난 등
- 무신정권에 항거 신분 해방 운동
- 그의 일생은 민중 투쟁과 함께해
- 피지배계급 주체성에 대한 관심
- 삼국유사 저술하게 된 핵심 동력
단재 신채호는 ‘조선사연구초’(1929)에서 묘청(妙淸)의 서경천도운동(1135∼1136)을 두고 ‘일천년래 제일대사건(一千年來第一大事件)’이라 했다. 비록 실패했으나, 그 의의를 높이 평가한 것이다. 그런데 나는 무신 집권기(1170∼1270)에 일어난 연속적인 민중 항쟁을 ‘한국사 5000년 제일의 사건’이라 말하고 싶다. ‘민중’이야말로 한국의 역사와 문화, 사상을 관통하는 핵심인데, 그 정수를 보여준 것이 고려의 민중 항쟁이기 때문이다. 민중 항쟁은 승려로서 일연에게 민중의 존재를 일깨워주어 ‘삼국유사’ 저술을 추동한 핵심 동력이기도 했다. 이는 곧 ‘민중’을 제쳐두고서는 ‘삼국유사’를 온전하게 해석할 수 없다는 뜻과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어떻게 일연은 이 민중에 주목하게 되었을까?
■한국사 최대의 민중 항쟁
“우리나라에서는 경인년(1170)과 계사년(1173) 이래로 고관대작이 천한 노비에서 많이 나왔다. 장수와 재상의 씨가 어찌 따로 있겠는가! 때가 오면 누구나 될 수 있다. 우리라고 어찌 뼈 빠지게 일하며 채찍 아래에서 괴롭게만 살겠는가!”
고려 신종(神宗) 원년(1198), 최충헌의 집 종인 만적(萬積)이 개경의 북산(北山)에서 도성의 노비들을 모아놓고서 주창한 말이다. 한국사 최초의 ‘신분 해방 선언’이라 할 수 있는 외침이었다. 신분제를 당연하게 여기던 시절에 이런 선언을 할 수 있었던 계기는 경인년과 계사년의 일 곧 무신정변(武臣政變)이었다. 문신의 차별과 멸시에 울분을 참지 못한 무신들이 일으킨 정변이 신분 질서의 모순과 폐해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이다.
1174년 서경유수(西京留守) 조위총(趙位寵, ?∼1176)이 무신정권에 반발해 봉기했다. 오랫동안 관리의 수탈과 과중한 부역에 시달리던 서북 지역 민중도 호응했다. 비록 3년 만에 진압됐으나, 이 봉기는 한국사에서 가장 오래 이어진 대규모 항쟁의 기폭제가 됐다. 1176년에는 공주의 천민 집단인 명학소(鳴鶴所)에 살던 망이(亡伊)와 망소이(亡所伊) 형제가, 그리고 서산의 가야산을 중심으로 손청(孫淸)이 봉기를 일으켰다. 1177년 익주(益州, 전북 익산)에서 미륵산적(彌勒山賊)이 봉기했으며, 1182년 관성(管城, 충북 옥천)과 부성(富城, 충남 서산) 그리고 전라도 전주(全州)에서 민중 항쟁이 일어났다. 1190년 동경(東京, 경주) 일대에서 봉기가 일어났고, 1193년 김사미(金沙彌)와 효심(孝心)이 각각 운문(雲門, 경북 청도)과 초전(草田, 경상도 울산)에 근거지를 두고 봉기했다.
1199년 명주(溟州, 강릉)에서 일어난 봉기가 삼척과 울진으로 확대됐고, 1200년에는 진주(晉州)에서 노비들이 봉기했다. 1202년 이비(利備)와 패좌(孛佐)가 이끄는 대규모 항쟁이 경주와 운문 일대에서 다시 일어났는데, 이때 대구 부인사(符仁寺)와 동화사(桐華寺) 승려들도 들고일어나 무신 정권에 항쟁했다. 경주와 운문 일대 항쟁은 가장 오래 격렬하게 지속됐다. 1218년 진위현(振威縣, 지금의 평택)에서 이장대(李將大) 등이, 서경에서 최광수(崔光秀) 등의 군졸이 봉기했으며, 1220년에는 남원(南原)에서 농민이 봉기했다. 몽고의 침략을 받던 1232년에도 충주에서 관노(官奴)들이 봉기했고, 1233년에는 경주에서 최산(崔山)·이유(李儒) 등의 농민 봉기가 있었다. 1237년 담양군(潭陽郡)을 중심으로 이연년(李延年) 등이 현실의 질곡에서 벗어나기 위해 항쟁했다. 그리고 1257년 안열(安悅) 등이 원주에서 봉기했는데, 이는 몽고 침입기 최후의 항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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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 부인사 터와 동화사의 대웅전. 1202년 부인사와 동화사 승려들도 무신 정권에 항거했다. 문화재청·국제신문 DB |
■항쟁 지역과 일연의 동선(動線)
평생을 유행(遊行)했던 일연은 민중 항쟁이 가장 격렬하고 오래 지속된 경주와 운문에서 가까운 경산에서 태어났다. 태어나기 직전까지 10여 년이나 이어진 그 일대 항쟁에 대해 일연이 듣지 못했을 리 없다. 더구나 나중에 포항의 오어사에도 머물고 운문사에도 주석했으니.
일연은 10대 초반 광주 무량사에서 강원도 양양의 진전사로 갔다. 항쟁이 있었던 전주, 공주, 충주, 원주 등을 거쳐야만 하는 행로였다. ‘삼국유사’에는 일연이 이들 지역에서 들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서동요’에 나오는 ‘무왕(武王)’은 익산 지역과, ‘후백제 견훤(後百濟甄萱)’은 완산주(完山州) 곧 전주와, ‘남부여 전백제 북부여(南扶餘前百濟北扶餘)’는 부여 일대와 관련이 있다. 특히 ‘진표전간(眞表傳簡)’의 주인공 진표는 완산주 출신으로 김제, 부안군 등 전라북도 일대를 두루 다니며 수행한 뒤 강원도 명주 곧 강릉으로 갔던 승려다. 진표의 행로는 일연이 광주에서 양양으로 갈 때와 흡사하다.
일연은 20대에 승과(僧科)에 합격한 뒤에는 강원도에서 대구 비슬산으로 내려왔는데, 이때 명주와 삼척, 울진 봉기에 대해 듣고 알았을 것이다. 또 ‘삼국유사’ ‘의해(義解)’편의 ‘심지계조(心地繼祖)’에 “지금의 동화사(桐華寺) 첨당(籤堂) 북쪽에 있는 작은 우물이 이것이다”는 구절을 보면, 대구 동화사에 들렀음을 알 수 있다. 1202년 동화사와 부인사(符仁寺) 승려들은 무신 정권에 항쟁했다. 일연은 예순이 넘어 다시 비슬산 인흥사에 주석했다.
1249년 비슬산에서 남해에 갈 때는 노비의 봉기가 있었던 진주 지역을 지났고, 1261년 강화도 선월사에 갈 때나 1282년 개경에 갈 때는 무신 집권기 초기에 항쟁이 지속됐던 양광도(楊廣道, 지금의 충청도)를 지나갔다. 특히 충렬왕의 부름으로 개경에 갔을 때는 만적의 난을 비롯해 서경에서 일어난 항쟁들에 대해 듣고 알았을 것이다.
일연이 일생 다니거나 머문 지역을 지도에 그려 놓으면, 무신 집권기 때 일어난 민중 항쟁 지역과 거의 겹친다. 물론 동선이 겹친다는 것만으로 민중이 ‘삼국유사’를 저술하게 만든 동기이자 해석의 관건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민중에 대한 일연의 각성이 전제돼야 하기 때문이다.
■일연의 필연적 화두 ‘민중’
민중 항쟁은 지배층의 가혹한 수탈과 부역에 대한 소극적 저항이 아니었다. 만적의 외침에서 알 수 있듯 민중의 각성에서 비롯된 투쟁이었다. “장수와 재상의 씨가 어찌 따로 있겠는가!”는 말은 세상에는 본디 차별이란 없으며 모두 평등하다는 이치에 대한 각성의 표현이다. 이 외침이 부처와 중생은 다르지 않다고 하는 불교의 이치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화엄경’에서는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에는 차별이 없다”고 했다. 모든 존재는 대등하고 평등한데 망상과 미혹으로 차별을 일삼기에 번뇌와 고통이 끊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보각국존비’에서는 일연이 “중생의 세계는 줄지 않고 부처의 세계는 늘지 않는다”는 화두로써 참구했다고 전한다. 이 화두는 부처와 중생 또는 성인과 범부 사이에 과연 차별이 있는가를 다룬다. 일연은 보잘것없는 신분 출신이면서 중생의 허물을 벗고 부처가 되려 애쓴 승려였다. 더구나 민중의 이야기에 누구보다도 관심을 갖고 귀를 기울였다. 그런 그가 항쟁 지역을 두루 다녔으니, 차별에 항거하며 신분 해방을 외친 민중이 얼마나 주체적이고 존엄한 존재인지 깊이 자각하며 공감했을 것은 당연하다. 그런 민중에 대한 보고서가 ‘삼국유사’다. 정천구 고전학자
※공동기획
·㈜상지엔지니어링 건축사사무소 ·국제신문 인문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