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주 금강암 승려 되기 전부터
- 마음에 품고 있던 판소리 소재
- 12년여 다듬어 세상에 내놔
- 판소리 예술 집대성한 신재효
- 그가 발굴한 여성 명창 진채선
- 둘의 애절한 사랑 바탕으로
- 소리꾼 이야기 절절히 풀어내
- “소설 속 소리 들을 수 있도록
- 듣는 책으로도 발간할 계획”
판소리 완창을 처음 본 것은 대학 1학년 때였다. 축제 행사 중 ‘흥부가 완창’ 공연이 있었다. 학생들은 화려하고 재미난 볼거리에 흥미를 느꼈고, 판소리는 어쩐지 고루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대강당 관객석에는 동원(?)된 것으로 보이는 학생회 간부들이 있었다. 필자는 ‘흥부가’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렸을 때 전래동화집에서 읽기도 했고, 국어 시간에 배우기도 했다. 그런데 판소리 공연을 보면서 “나는 지금 처음으로 흥부가를 만나고 있다”는 걸 비로소 알았다. “나는 판소리가 어떤 예술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것도 깨달았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공연은 압축되고 각색된 이야기가 아니라 오래전 이 땅의 백성들이 울고 웃으며 들었던 ‘진짜’ 흥부가였다. 눈부신 조명도 없었고, 병풍 하나가 유일한 무대 세트였다. 하지만 소리꾼과 고수 단 두 사람이 소리와 장단으로만 4시간이 훌쩍 넘게 이끌어가던 그 공연은 마음을 가득 채웠다. 강렬한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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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남 진주시 대곡면에 있는 금강암 수세미덩굴 아래서 최혜인 작가가 소설 ‘소릿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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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혜인 소설가의 판소리 역사소설 ‘소릿고’는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주었다. 판소리를 집대성한 신재효와 진채선의 사랑과 예술혼을 그린 ‘소릿고’의 작가를 경남 진주에서 만났다.
■마음에 들어온 이름, 진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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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릿고- 최혜인 지음/북인/2020 |
최혜인은 1964년 경남 창원에서 태어났다. 경남일보에 단편소설 ‘결’이, 동양일보에 단편소설 ‘소금 볶는 여자’가 당선돼 등단했다. 첫 소설집 ‘학이 날고’로 경남문학 우수작품상을 받았다. ‘소릿고’는 12년여 가슴에 품고 다듬었던 작품으로, 올해 7월에 세상에 나왔다.
최혜인은 승려이다. 진주시 대곡면 단목길에 있는 금강암이 그가 머무는 곳이다. 입구를 들어서자 작은 풀밭, 수세미가 영글어가는 덩굴이 보인다. 아직은 여름이 쉽게 못 물러서겠다며 햇빛을 쏘아대는 날이었는데, 수세미 덩굴 아래 그늘은 시원했다. 입구 옆 작은 방은 글도 쓰고, 찾아오는 사람도 만나는 곳으로 소박하고 정결했다.
“대학을 늦게 갔어요. 문예창작과, 국어국문학과, 동국대 불교대학원…. 글공부 마음공부를 했고, 출가도 했죠. 그 시간 동안 소설은 한 번도 마음에서 떠난 적이 없었어요.”
소설가와 승려. 전혀 다른 곳에 서 있을 것 같은데 최혜인은 어떻게 생각할까. 소설의 에필로그에서 그는 이렇게 털어놓았다. “사방팔방 뻗어 나가던 생각의 갈래를 거두고 거두어 안으로 안으로 한 점이 되게 하는 것이 불가의 수행법인데 소설은 정반대였다. 바늘 끝 같은 한 점에서 생겨난 생각을 펼치고 펼쳐서 하나의 소우주를 만들어 내는 대역사이다. 어떻게 접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내 수행의 화두다.”
최혜인은 또 이렇게 썼다. “쓴다는 것, 소설을 쓴다는 것은 짜디짠 바닷물을 채운 물지게를 지고 뻘밭을 기는 행위였다. 끝없이 기고 또 기어도 물지게는 채워지지 않았다.”
작가를 만나기 전부터 궁금했던 것이 왜 판소리 소설을 썼는가였다. 대답은 간단했다. “우연히 ‘진채선’이라는 이름을 만났죠. 이름이 너무 예뻐서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알아보았습니다. 그게 이 소설의 시작이었습니다.” 진채선은 조선 최초의 여성 명창이었다.
■판소리에서 피어난 사랑과 예술혼
‘판소리’는 ‘여러 사람이 모인 장소’라는 뜻의 ‘판’과 ‘노래’를 뜻하는 ‘소리’가 합쳐진 말이다. 인간의 희로애락을 음악적으로 표현하는 예술로, 우리나라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이다. 2003년,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세계무형유산걸작’으로 선정됐다.
중인으로 태어난 신재효에게 신분적 한계와 현실의 장벽을 넘어서는 기쁨을 준 것이 판소리였다. 신재효는 판소리 예술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독보적인 인물이다. 소리하는 여성을 소리꾼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시대에 진채선을 발탁해 여성 명창으로 키워냈다. 진채선은 세습무의 딸로 태어났고 어렸을 때부터 소리에 재능이 있었다. 진채선의 소리는 당시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던 판소리의 관념을 뒤집었다. 진채선은 여성의 목소리로 판소리 명창 반열에 오른 첫 번째 인물이었다.
최혜인은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이 있었기에 그들의 예술혼이 피어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소설 속에서 신재효는 경회루 낙성연에 진채선을 보내며 이렇게 말한다. “정말이지 너를 세상 그 누구에게도 주기 싫었다, 바람자락에도 머리카락 한 올 맡기기 싫었다. 바람이 너의 머리카락을 핥고, 햇볕이 너의 몸에 닿는 것조차 견디기 힘들었다.” 그렇게 아낀 제자를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붙잡고 돌려보내지 않았다. 스승이 중병으로 죽어간다는 소식을 듣고 운현궁을 빠져나온 진채선은 신재효를 찾아간다. 판소리에 관한 이야기도 좋지만, 두 사람이 느끼는 사랑은 읽는 사람까지 빨려들게 한다. 소설은 신재효가 나라 방방곡곡에 흩어진 판소리 가사를 모았던 일은 두 사람의 약조였다고 풀어냈다. “판소리를 예술의 반열에, 천대받는 소리꾼을 예인의 반열에 올려주겠다는 약조를 꼭 지키마”라는 신재효의 다짐은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판소리 가사를 집성한 그의 마음을 느끼게 한다.
진채선을 아낀 대원군이 신하들에게 한 말은 판소리가 무엇인지 알려준다. “판소리에는 우리 민족의 애환과 삶과 정서와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단 말이오. 그런 노래를 부르는 이가 없다면 어찌 되겠소. 우리의 것이 무엇으로 남아 후대로 이어지겠소.” 신재효, 진채선, 흥선대원군의 말은 모두 최혜인의 말이다. 예쁜 이름 ‘진채선’이 작가의 시선을 판소리로 이끌었고, 우리 소리와 소리꾼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소설을 다 읽고 난 다음에 판소리가 오래 마음에 남았다. 인류무형유산인데, 정작 그 유산이 태어난 나라에 살면서도 잘 모르고 있었다는 부끄러움도 느꼈다. 소설 속 소리 대목을 실제로 듣고 싶어졌다. 최혜인은 이 소설을 ‘듣는 책’으로 만들 계획이다. 소리꾼이 직접 소리를 하는, 들을 수 있는 ‘소릿고’가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얼씨구, 좋구나’ 추임새도 하면서 들어보고 싶다.
책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