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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주의 그곳에서 만난 책 <91> 정희경의 시조집 ‘해바라기를 두고 내렸다’

“우리 고유의 시조 지키겠다는, 투사의 마음으로 작시”

  • 국제신문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20-10-04 18:55:43
  •  |  본지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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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교 문예부때 처음 접한 시조
- 계속 쓸 숙명을 타고난 것 처럼
- 대학에서도, 주부가 되어서도
- 시조와의 인연 끊임없이 이어져
- 현재는 아이들에 ‘말 맛’ 가르쳐

- “고루하다는 편견 팽배한 시조
- 글자 수에 갇혔다는 오해 대신
- 형식 갖춘 문학으로 알리고파”

언젠가 글벗들과 시를 한 수씩 외고 나면 술 한 잔을 마실 수 있는 놀이를 했다. 저마다 기억을 짜내느라 힘들어했는데, 한 친구는 거침없었다. 그가 외는 것은 시조였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모두들 그때부터 시조를 읊기 시작했다. 학창 시절 국어 시간에 배웠던 시조가 줄줄 이어졌다. 단 한 수의 시조에 작가의 삶과 정신세계가 통째로 배어있다는 걸 새삼 느꼈다. 우리가 욀 수 있는 시조가 제법 많다는 것에 놀라기도 했다. 시조는 우리 민족이 만들어 낸 독특한 정형시이다. 고려 말기부터 발달해 조선 초기에 완성됐으니 그 역사가 길다. 조선 건국을 앞두고 이방원이 정몽주의 마음을 얻기 위해 ‘하여가(何如歌)’를 지어 부르자, 정몽주는 ‘단심가(丹心歌)’라는 시조로 고려에 대한 충심을 보였다는 일화가 문헌에 전해진다. 새로운 왕조를 세우는 중대한 상황에서 시조를 지어 서로의 뜻을 내비쳤다니, 당시에 시조가 얼마나 많이 불려졌는지 알 수 있는 증거이다. 하지만 세월이 갈수록 시조가 설 자리가 좁아지는 듯하다. 시조집 ‘해바라기를 두고 내렸다’의 정희경 시조시인을 만났다.
부산 해운대구 생태하천 담쟁이길에서 만난 정희경 시인이 시조의 매력을 설명하고 있다.
■계속 찾아온 시조와의 인연

지하철 벡스코역에서 땅 위로 올라오면 높은 빌딩들이 보인다. 그런데 정희경 시인이 알려준 길로 접어들자 하천이 흐르고 있어 도심 한가운데라는 걸 잠시 잊게 했다. 해운대구 우2동 통장연합회가 가꾸는 생태하천 ‘담쟁이길’이다. 근처 아파트에 사는 정희경 시인이 즐겨 걷는 산책로이다. 그는 담쟁이길과 이어지는 길과 골목을 소개하며 천천히 걸었다. “이 동네에 오래 살면서 개발과정을 지켜보았지요. 남아있었으면 하는 것들이 사라지는 모습도 보았고요. 이 길을 걸으면서 주변을 둘러보는 게 좋습니다. 여전히 제 모습을 지키는 작은 가게와 낯익은 사람들을 만나면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담쟁이길에는 가을이 천천히 물들고 있었다.

해바라기를 두고 내렸다- 정희경 지음 / 책만드는집 /2020
정희경은 1965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책을 좋아했고 글쓰기 상도 여러 번 받았죠. 중학교 시절 국어 선생님이 ‘글 참 잘 쓰네’라고 하신 말씀이 가슴에 새겨지면서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운명이라고 해야 할까. 그가 걸어온 길에는 시조가 늘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문예부에 가입했다. 담당교사가 김세환 시조시인이었고, 문예부 자체가 시조 동아리였다. 고등학교 시조 동아리의 전통이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니 놀랍다. 문예부 출신 ‘한얼동인’ 회원들이 30주년 기념행사를 하며 동인시조집도 엮었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였는데, 교실개혁을 위한 제언을 하는 자리에서 교장선생님께 동인집을 드렸어요. 그런데 교장선생님이 시조시인이셨죠. 시조를 쓰는 어머니를 만났다고 반가워하시면서 2007년에 ‘강동 어머니 시조교실’을 만들어주셨어요. 어머니와 아이가 함께 시조 쓰는 시간도 가지고, 책도 냈어요. 다른 초등학교의 시조 강사를 맡기도 했습니다.” 시조를 쓸 숙명을 타고난 것처럼, 그의 주변에는 시조와의 인연이 끊이지 않았다. 경북대 국어국문학과 시절에도 ‘시조를 쓰는 특이한 여학생’에 관심을 가지는 선배들이 많았다.

정희경은 2008년 전국시조백일장 장원, 2010년 ‘서정과현실’ 신인작품상 당선으로 등단했다. 하지만 그의 등단을 2008년으로 보자니 필자가 괜히 속상하다. 그의 시조력은 고등학교 시절부터라고 보는 게 맞지 않을까. 그는 현재 ‘한국동서문학’ 편집장과 ‘어린이시조나라’ 편집주간을 맡고 있다. 어린이들이 시조를 만나는 일은 그에게 큰 기쁨이며 희망이다. 시조집으로 ‘지슬리’ ‘빛들의 저녁시간’ ‘해바라기를 두고 내렸다’, 평론집으로 ‘시조, 소통과 공존을 위하여’를 냈으며, ‘영언’ 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가람시조문학신인상, 올해의시조집상, 오늘의시조시인상, 부산시조작품상을 수상했다.

■시조를 지키고 싶은 마음

“시조시인들은 투사 같은 마음으로 시조를 쓰고 있어요. 우리 고유의 시조를 지켜야 한다는 마음이 크니까요. 시조가 사라질 것인가, 살아남을 것인가…. 힘들 때가 많지만, 그래서 더 매력적입니다. 글자 수에 갇혀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갖춘 문학입니다. 어린이들에게 시조를 가르쳐보면, 글자 수에 맞는 바르고 고운 말을 생각해내서 재미있게 쓰는 걸 볼 수 있어요. 언어교육, 인성교육에도 시조가 좋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쓸 수 있는 게 시조입니다.”

정희경의 시조집 ‘해바라기를 두고 내렸다’에서는 시조의 형식을 그대로 갖춘 작품들이 실려 있다. 형식을 그대로 살려두니 ‘시조의 맛’이 제대로 난다. 한눈에 척 보아도 ‘이것은 시조’라는 느낌이 들었다. 형식은 고루한 것이 아니라, 본래 모습이었다.

정희경은 우동의 시장과 시댁이 있는 청도군 지슬리, 일상의 사물 등 보고 겪고 느낀 것을 시조로 표현한다. 그래서 혼자 뭔가를 골똘히 보고 있을 때가 많다. 주변에서는 그런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또 뭘 보고 있어? 시조 쓰려고 그러지?”

눈에 들어온 사물, 포착된 시간을 놓치지 않으려는 그의 시조 한 편을 읽어보자. 한겨울 시래기를 보면서 쓴 ‘대한(大寒)’이다. “한때는 뿌리를 단 싱싱한 몸이었다/ 물기 없는 세상에 잎들은 남아있어/ 한 겨울 바람에 익은 시래기를 삶는다/ 섣달의 각질처럼 질겨진 껍질들/ 덕지덕지 붙어있는 겨울을 벗겨내면/ 초록빛 속살 같은 봄 웅크리고 있을까” 이 시조를 읽으면서 단단한 외면이 무한한 내면을 감싸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시조는 정해진 글자 수를 가지고 있지만, 읽을수록 그 안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있다는 것이다. 말린 시래기가 싱싱하게 되살아나는 것처럼 말이다.

정희경은 자신의 작품보다 시조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했다. 그의 시조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깊은지 이야기를 듣다가 “시조를 써보겠다”고 약속할 뻔했다. 시조를 좀 더 많이 읽는 것부터 시작해야겠다. 시조가 외롭게 버티게 할 수는 없다.

책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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