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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와 21세기 한국학 <7> 일연의 신이사관 ② 대등의 원리

지배적인 유교사관의 편협함 깨고 불교사관과 균형 맞추다

  • 정천구 고전학자
  •  |   입력 : 2020-10-11 19:39:24
  •  |   본지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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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연이 수용한 ‘신이사관’은
- 중국의 제왕과 삼국의 제왕이,
- 고대의 제왕과 중세의 성인이,
- 유교의 성인과 불교의 고승이
- 결국 대등하다는 철학이며
- 이는 삼국유사의 바탕이 된다

‘삼국유사’를 ‘신이사관(神異史觀)’에 입각한 역사서로 보는 까닭은 일연이 ‘기이’편의 ‘서(敍)’에서 “삼국의 시조가 모두 신이한 데서 나왔다고 한들 무엇이 괴이하겠는가?”(三國之始祖, 皆發乎神異, 何足怪哉?)라고 말하고 또 여러 군데서 ‘신이’를 강조하고 중시하는 발언을 했기 때문이다. 이로 말미암아 많은 연구자가 ‘신이’ 또는 ‘신이사관’을 분석해 그 의미를 밝히려 했다. “일상을 넘어서는 일상과 다른 것, 국가라는 공동체의 기원을 비롯하여 문화 전반에 작용하고 있는 것”이라거나 불교적 신이사관으로 보면서 “고려 왕실의 권위와 왕권의 신성성을 강조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는 것”으로 보는 등 다양한 해석이 나왔다.

그러나 대체로 ‘신이’라는 용어의 문자적 의미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고, 일연이 이 용어로써 말하려 했던 역사의 원리에는 거의 다가가지 못했다. 즉, ‘신이사관’을 피상적으로 이해하는 데서 그쳤을 뿐, ‘삼국유사’ 전체에서 일관되게 작용하는 심층적 원리까지 파고들지 못했다는 말이다. 여기서는 ‘서’를 통해 ‘신이’의 드러난 의미와 숨겨진 원리를 밝힌다.
   
신라 시조 혁거세의 부인 알영의 신이한 탄생을 알려주는 경주 알영정.
■드러난 의미, 중국과 삼국의 대등

‘서’의 첫 문장은 이렇다. “대저 옛 성인은 예의와 음악으로써 나라를 일으키고 어짊과 올바름으로써 가르침을 폈으므로 괴이함과 힘, 어지럽힘과 귀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大抵古之聖人, 方其禮樂興邦, 仁義設敎, 則怪力亂神, 在所不語.) 여기서 옛 성인은 유교의 개조인 공자(孔子)를 가리킨다. 공자가 한 말인 “불어괴력난신”(不語怪力亂神)까지 인용했다. 이는 일연이 유교사관을 염두에 두었음을 의미한다.

유교사관은 공자의 가르침에 따라 괴이한 일, 덕이 아닌 힘, 어지럽힘과 귀신 따위는 언급할 가치가 없거나 거론할 수 없다는 인식 위에서 역사를 본다. 그러나 일연은 그런 사관이 자가당착이라 여겼다. 유교에서 걸핏하면 들먹이는 중국 고대 제왕들의 탄생도 괴이하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

“무지개가 신모(神母)를 둘러싸자 복희(伏羲)를 낳았고, 용이 여등(女登)을 느끼게 하자 염제(炎帝)를 낳았으며, 황아(皇娥)는 궁상의 들에서 노닐 때 스스로 백제(白帝)의 아들이라 일컬은 신동(神童)과 정을 통해 소호(少昊)를 낳았고, 간적(簡狄)은 알을 삼키고 설(契)을 낳았으며, 강원(姜嫄)은 발자국을 밟고 나서 기(棄)를 낳았고, [요의 어머니는] 아이를 밴 지 열네 달 만에 요(堯)를 낳았으며, [패공의 어머니는] 용과 큰 연못에서 정을 주고받은 뒤에 패공(沛公)을 낳았다. 이 뒤에도 이런 일이 줄곧 있었으니 어찌 다 적을 수 있겠는가!”

복희와 염제는 신화 속 인물이라 제쳐두더라도 소호와 설, 기, 요, 패공 등은 역사 속 인물이다. 사마천의 ‘사기’는 ‘오제본기(五帝本紀)’로 시작하는데, 오제의 처음은 황제(黃帝) 헌원씨(軒轅氏)고 그의 아들이 소호다. 설과 기는 각각 상(商) 왕조와 주(周) 왕조 시조다. 요는 황제의 고손자다. 패공 유방은 한(漢)나라를 일으켰다. 이들 모두 그 탄생이 기이함에도 제왕이자 성인으로 추앙받으며 중국 역사서에 당당히 올라 있다.

일연은 동아시아 유가 지식인들이 제왕이자 성인으로 여겼던 중국 고대의 인물들을 끌어와 그들이 공통으로 ‘괴력난신’을 보여주었다며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삼국의 시조가 모두 신이한 데서 나왔다고 한들 무엇이 괴이하겠는가?”라고. 그러면서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락국 등을 연 시조들의 신이한 탄생을 빠뜨리지 않고 서술했다. 이로써 중심인 중국과 주변인 삼국은 그 연원에서부터 다르지 않다고 하는 ‘대등론’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서’의 표면적 의미에 지나지 않는다.

■제왕·성인, 성인·고승의 대등론

   
중국의 제왕이자 성인으로 간주된 소호의 초상.
‘서’는 분명히 중국의 제왕들과 삼국의 제왕들은 서로 다르지 않으며 대등하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많은 연구자가 주장하거나 의문을 제기하듯 ‘삼국유사’에는 제왕과 관련이 없는 조목이 매우 많을 뿐만 아니라 신라의 왕들을 연대기적으로 서술한 ‘기이’편에서조차 왕이 아닌 인물들이 등장하며 심지어 왕을 비판하거나 폄하하는 내용이 담긴 조목들도 있다. 특히 ‘흥법’ 이하는 제왕보다 고승들이 주로 등장해 불교적(佛敎的) 신이(神異)라고 할 만한 자취를 보여준다. 제왕의 신이와 다른 이런 내용은 그저 예외적인 것일까?

숨겨진 원리는 ‘서’의 심층을 읽어야 찾아낼 수 있다. 일연은 “옛 성인은 예의와 음악으로써 나라를 일으킨다”고 했다. 이때 성인은 공자를 본보기로 하는 유교의 성인을 가리킨다. 그런데 제왕은 여느 사람과 다르다고 한 뒤 “황하(黃河)에서 그림이 나오고 낙수(洛水)에서 글이 나온 뒤에 성인이 일어났다”고 했다. 천지의 질서와 변화의 원리를 담았다고 하는 하도낙서(河圖洛書)를 거론했는데, 이때의 성인은 곧 제왕이다.

유교에서는 고대 제왕들을 성인으로 간주했다. 성인이라야 제왕이 될 수 있다고 보았으니, 이른바 ‘내성외왕(內聖外王)’이다. 내성외왕은 안으로는 성인의 덕을 갖추고 밖으로는 제왕의 지위에 있는 자를 가리킨다. 요와 순이 숭앙된 이유다. 그러나 공자 이후에는 제왕이 반드시 성인은 아니며 성인이라고 제왕이 되는 것도 아니라는 인식이 나타났다. 춘추전국시대 대혼란이 그런 인식을 확증해주었다. 유교와 유교적 정치 질서에서는 성인인 공자를 ‘소왕(素王)’으로 일컬으면서 제왕에 버금가는 존재로 드높이며 제왕과 대등하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신이한 양지 스님의 작품으로 알려진 사천왕사의 녹유신장벽전.
이렇게 제왕과 성인은 대등한 존재이며 상호보완하는 관계에 있다고 보는 유교적 질서관은 중세 질서의 한 축일 뿐이다. 동아시아의 중세인들은 유교뿐 아니라 불교의 세계관을 아울러 받아들였고, 역사 또한 그 두 축 위에서 전개됐다. 특히 유교의 성인보다 불교의 고승이 더욱더 많았을 뿐만 아니라 상층과 하층의 사람들로부터 두루 존경과 숭앙을 받았다. 일연은 유교사관이 간과한 한 축을 ‘신이’로써 되살려냈다.

<양지사석(良志使錫)>과 <심지계조(心地繼祖)>, <혜현구정(惠現求靜)> 등에서 일연은 고승의 신이에 대해 “그 신이함은 헤아릴 수 없다”(其神異莫測)거나 “뭇 승려들이 그의 신이를 보았다”(衆見其神異)거나 “신이로써 산중에 알려졌다”(以神異聞山中)고 해 직접적으로 표현했다. 이는 ‘서’의 신이가 유교의 제왕과 성인을 넘어 고승에도 해당될 뿐 아니라 유교의 성인과 불교의 고승은 대등하다는 논리의 표현이기도 하다.

■신이사관은 대등론의 사관

공자가 말하지 않는다고 한 ‘괴력난신’을 거론하며 일연은 유교사관의 우위와 편협함을 깨뜨렸을 뿐만 아니라 유교사관과 불교사관을 아우르는 ‘신이사관’의 근거로 삼아 대등론을 펼쳤다. 이 대등론은 고대의 제왕과 중세의 성인은 다르지 않다는 것과 유교의 성인과 불교의 고승은 다르지 않다는 이론이다. 이 대등론을 바탕으로 구성되고 체재를 마련한 것이 ‘삼국유사’다. 이에 관해서는 이후 자세히 다룬다.

   
그러나 유교사관과 불교사관 모두 지식인의 역사인식에 지나지 않는다. 신이사관은 그 둘을 아우르면서 더 나아갔다. 앞서 제시한 원리 외에도 또 다른 원리가 내재해 있다는 말이다. 그 원리까지 밝혀야 비로소 ‘삼국유사’의 복잡성과 복합성이 풀린다.

정천구 고전학자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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