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시작해 무려 12년 동안 방영된 ‘전설의 고향’. 으슥한 무덤가에서 머리를 풀어 헤치고 등장하는 소복 여귀, 저승사자, 한쪽 다리 없는 귀신 3종 세트에 놀라 이불 속으로 숨던 겨울밤, KBS ‘전설의 고향’은 MBC ‘암행어사’와 함께 1980년대 최고 인기 드라마였다. 80년대 후반이 되자 소재 빈곤과 어설픈 특수효과로 인해 잠시 막을 내렸던 ‘전설의 고향’은 납량 특집으로 1996년에 부활했다. 1987년 개봉한 홍콩 영화 ‘천녀유혼’이 왕조현의 몽환적 외모와 특수효과로 국내 판타지 드라마의 효시였던 ‘전설의 고향’ 제작을 다시금 돌아보게 한 것이다.
여자 귀신은 소복에 피 흘리며 무덤을 쪼개고 등장한다는 전형성을 전복한 아름다운 ‘천녀유혼’ 여귀의 등장. 한국 공포 드라마 제작진은 고심에 빠졌다. 그리고 생각해낸 것이 구미호의 변신이었다. 영화계에서는 이미 고소영 정우성 주연 ‘구미호’가 1994년 개봉했고, 현대화된 공포 이야기에 맞서려면 친숙하면서도 우리 정서에 맞는 소재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렇게 돌아온 구미호는 박상아 송윤아 박민영 등 당대 최고 스타를 거치며 여성 신인 등용문이 됐다. 2004년 ‘구미호 외전’에서 구미호는 화려한 액션을 보여주는 여전사로 변했고 2010년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에 이르러서는 요괴가 아닌, 사람 간보다 소고기를 좋아하는 여우로 변신했다.
2020년 드디어 남자 구미호가 등장했다. 드라마 ‘도깨비’에서 기억상실 저승사자였던 이동욱이 과거 산신이었던 구미호로 나와 요괴들과 싸운다. 피 맛 나는 간보다 민트 초코 아이스크림을 퍼먹으며 미드 보는 구미호는 젊고 젠틀하며 지고지순하다. 삼도천 문지기나 우렁각시, 수호신 등 무속과 설화 속 존재가 이야기를 끌어가는 것도 흥미롭다. 주목할 것은 불사의 삶을 위해 상대와 나를 희생시키는 한(恨)의 정서에서 벗어나 너도 살고 나도 사는 상생의 판타지로 드라마 트렌드가 바뀌고 있다는 사실이다. 불안하고 어지러울수록 사람들은 판타지에 집착한다. 판타지는 시대 불안을 가늠하는 척도이자 소통 창구이며, 대중은 판타지를 통해 위로받는다. 여우의 옷을 입은 남자 이야기가 우리 마음을 어떻게 사로잡을까.
동명대 외래교수·대중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