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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와 21세기 한국학 <8> 일연의 신이사관 ③ 민중의 사관

사관(史官)이 민중의 삶 배제…백성은 그들 눈높이로 역사를 써내려갔다

  • 정천구 고전학자
  •  |   입력 : 2020-10-18 19:24:12
  •  |   본지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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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중의 인식 받아들인 신이사관
- 국호 등 업적 남긴 신라 지증왕
- 배우자 찾는 한낱 사내로 묘사
- 빼어난 영웅이라 불린 김유신도
- 범에 놀라 자빠진 인간으로 서술

- 반대로 평범한 중생의 이야기는
- 대담하고 비범하게 그려내면서
- 왕·영웅·고승과의 대등함 일깨워

신이사관은 정치적 제왕과 종교적 성인은 대등하며, 유교의 성인과 불교의 고승 또한 대등하다는 ‘대등의 원리’를 내포한다고 이미 말했다. 그리고 이는 지식인과 승려들이 내세우는 대등의 원리일 따름이라고도 했다. 그렇다면, 이에서 더 나아간 원리는 무엇인가?
   
부처와 중생의 대등함이 표현된 남산의 할매부처.
한 가지 언급해 둘 것이 있다. ‘신이시관’이라 했으므로 ‘신이(神異)’라는 말이 자칫 선입견이나 편견을 갖게 할 수 있어서다. ‘신이’라고 하면, 신통하고 신령스런 일, 요컨대 범상하지 않으며 비합리적이고 불합리한 일을 곧이곧대로 믿고 수용하는 것으로 여길 수 있다. 실제로 그렇게 이해하고 해석하는 연구자도 적지 않다. 그것은 ‘신이’의 글자에 매여서 이해한 탓이고,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신이’가 사관으로 성립되기 위해서는 합리적인 사유와 판단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 이는 일연도 강조하는 점이다. ‘신이사관’은 기록이나 구전 모두 역사 이해나 역사 인식을 담은 표현이므로 신이한 일이라도 역사 속에서 합리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관점이다.

■제왕·영웅·백성은 대등하다

   
지철로왕의 배필을 찾았다는 모량리 유적지. 경주 건천읍에 위치한다. 영남문화재연구원
‘삼국유사’에 <지철로왕(智哲老王)>이 있다. 왕의 배필을 찾는 내용인데, 이야기는 이렇다. “왕은 음경의 길이가 한 자 다섯 치여서 좋은 짝을 얻기 어려워 사자를 삼도(三道)에 보내 짝을 찾도록 했다. 사자는 모량리(牟梁里) 동로수(冬老樹) 아래에 이르렀다가 두 마리 개가 북 만큼이나 큰 똥덩어리 하나를 서로 양쪽 끝을 물고 다투는 것을 보았다. 마을 사람들에게 물었더니, 한 소녀가 알려주었다. ‘이 고을 상공(相公)의 딸이 여기에서 빨래하다가 숲속에 숨어서 눈 것입니다.’ 사자가 그 집을 찾아가 살펴보니, 여자의 키가 일곱 자 다섯 치나 되었다. 이를 왕에게 자세히 아뢰자 왕은 수레를 보내 궁중으로 맞아들여서 황후로 봉했으며, 신하들도 모두 축하했다.”

지철로왕은 지증왕(智證王)이다. 국호를 신라(新羅)로 결정하고 처음으로 시호를 쓴 왕이다. 그의 업적은 대단했다. 악습인 순장(殉葬)을 없애고 농사를 권장하면서 소를 이용하게 하고 선박 이용 제도를 제정하는 등 국가의 체제를 정비했다. 법흥왕과 진흥왕이 그 뒤를 이어 국호 그대로 “날로 새로워지며 사방을 망라하는” 강력한 중앙 집권 국가로 나아가는 근간을 이때 마련했다.

그런데 민중은 엉뚱한 이야기를 했다. 지철로왕은 음경이 너무 커서 짝을 얻기가 어렵자 사자를 보내 온 나라에서 짝을 찾게 했다며 두 마리 개가 똥덩어리로 싸우는 광경이 실마리가 되었다고 한다. 이는 체격이 매우 컸다는 왕을 희화화한 것이 아니다. 지존이며 대단한 업적을 남긴 왕이라도 곤룡포를 벗고 지위를 내려놓으면 그저 한낱 사내이며 평범한 백성과 다를 바 없다고 해 존귀한 왕을 미천한 백성과 대등하다고 본 것이다.

<진덕왕(眞德王)>에서는 “알천공(閼川公)·임종공(林宗公)·술종공(述宗公)·무림공(武林公)·염장공(廉長公)·유신공(庾信公)이 있었다. 남산 우지암(于知巖)에 모여 국사를 의논했다. 그때 커다란 범이 나타나 좌중 사이로 뛰어들었다. 여러 공들이 놀라 일어났으나 알천공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면서 범의 꼬리를 잡아 땅에 메쳐서 죽였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위의 인물들은 화랑 출신으로 매우 뛰어난 중신(重臣)들이었다. 그들이 국사를 의논할 때 범이 나타나자 위대한 영웅 김유신을 포함해 여러 공들은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영웅이라기에는 꽤 쑥스럽다. 범의 꼬리를 잡아 메친 알천공도 고작 힘을 과시한 사내일 따름이다. 영웅이라 일컬어지던 그들도 여느 백성과 다를 바 없는 인간임을 알려주고 있다. 이렇게 ‘삼국유사’는 제왕과 영웅도 백성과 다르지 않으니 대등하게 보아야 한다는 주장을 민중의 이야기로써 펼치고 있다.

■고승과 중생은 대등하다

영재가 도적들을 만난 이야기 ‘영재우적(永才遇賊)’을 보자. 천성이 익살스럽고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던 영재가 늘그막에 은거하려고 산으로 들어가다가 도적 60여 명을 만났다. 영재가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태연하니, 도적들이 이름을 물었다. 향가(鄕歌)를 잘하기로 소문난 영재임을 안 도적들은 노래를 지으라고 했다. 영재는 칼이나 휘두르다가는 끝내 후회하게 될 날이 올 것이라며 도적들을 일깨우는 내용의 향가를 지었다. 그 다음은 이렇게 이어진다.

“도적들은 노래의 뜻에 감동해 비단 두 필을 선물로 주었다. 영재는 웃으며 물리치고는 말했다. ‘재물이 지옥으로 가는 뿌리임을 알고 궁벽한 산으로 피해 일생을 보내려 하는데, 어찌 함부로 받겠는가!’ 그리고는 땅에 내동댕이쳤다. 도적들은 그 말에 또 감동해 모두 칼과 창을 던지고는 머리를 깎고 영재의 문도가 되어 함께 지리산에 들어간 뒤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영재의 나이 거의 아흔이었으니, 원성대왕 때였다.”

도적들의 칼날 앞에서도 태연한 영재가 노래로써 도적들을 감화시켰으니, 영재의 뛰어남을 말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면에는 다른 뜻이 있다. 세상에 노래를 한 번 듣고 고승의 말 한 마디에 감화되어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는 도적이 몇이나 될까? 영재야 본디 목숨 따위에 연연하지 않는 승려인 데다 나이가 거의 아흔이었으니 도적의 위협에 전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 반면에 사람을 위협하고 목숨을 빼앗는 짓도 서슴지 않던 도적들이 마음을 고쳐먹고 행동으로 옮긴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이다. 중생에게도 불성이 있다는 붓다의 가르침을 도적들이 그대로 보여준 셈이다. ‘영재우적’은 도적을 내세워 중생이 고승과 대등하다는 이치를 표현했다.

‘욱면비염불서승(郁面婢念佛西昇)’은 주인을 따라 절에 가서는 법당에 들어가지도 못해 마당에 서서 스님을 따라 염불한 여종 욱면의 이야기다. 시샘한 주인이 더 힘들게 부렸음에도 욱면은 할 일을 다 해놓고 절에 가서 지극하게 염불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늘에서 “욱면 낭자는 법당에 들어가 염불하시오”라는 소리가 들렸고, 욱면은 법당에 들어가 정진했다. 얼마 뒤 하늘에서 음악소리가 들리면서 욱면의 몸은 법당 지붕을 뚫고 나가 서쪽으로 천천히 사라졌다. 그 주인보다, 심지어 승려들보다 더 빨리 서방 정토로 갔다. 미천한 여종이 누구보다 더 뛰어나다면서 성불하는 일에서는 누구나 대등하다는 이치를 일깨워주고 있다.

■신이사관은 사관이 아닌 사관

   
유교 지배층이나 불교 승려들이 생각하는 바와 달리 현실과 역사에서 민중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겉으로야 세속의 권력자나 종교적 지도자 들이 역사를 끌고 나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백성 또는 민중의 판단과 선택이 역사를 추동하는 힘이었다. 민중이 지지하고 호응하느냐 아니면 반대하고 맞서느냐에 따라 역사의 흐름이 달랐다. 그럼에도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史官)들은 민중의 삶과 생각을 역사에서 배제해 왔다. 그런 상황에서 민중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자신들의 이야기에 자신들의 역사 이해를 담아 전하는 것이었다. 일연의 신이사관은 그런 민중의 이야기에 담긴 역사 인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신이사관은 역사적 존재로서 민중의 인식을 받아들인 사관(史觀)이며, 사관이 아닌 사관이다. 그래서 더욱더 역사적 진실을 잘 알려준다.

정천구 고전학자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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