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파는 형이 가져온 전집으로
- 어린시절 자연스레 문학수업
- 중3시절 여고생 작품에 감동
- 시에 마음 담고 싶어 써내려가
- 고향 안동의 풍경 녹여온 그
- 신작선 제주4·3, 몽골 고비 등
- 아픔 기억하는 시편 선보여
안상학 시인을 떠올리면 자연스레 안동이 따라온다. 그의 시를 읽으면 안동국수와 간고등어가 먹고 싶어지고, 무작정 안동으로 떠나고 싶어진다. 새로 나온 시집을 펼치면 또 다른 안동 이야기가 없나 궁금해서 그것부터 찾아보게 된다. 지난 9월에 나온 신작시집 ‘남아 있는 날들은 모두가 내일’을 볼 때도 그랬다. 시집을 읽고 난 후 마음에 고인 감정은 ‘슬픔’이었다. 그러고 보니 시집 말미에 실린 양안다 시인의 발문 제목이 ‘바닥으로부터 온 편지’이다. 안상학 시인은 지금 어디에 서 있는 것인가 궁금했다. 시인을 경북 안동시에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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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상북도 안동시 이천동 제비원에서 최근 시집 ‘남아 있는 날들은 모두가 내일’을 펴낸 안상학 시인이 미소 짓고 있다. |
■한 여학생의 시가 준 감동에서 시작
터를 옮겨 새로 단장한 안동터미널에 미리 나와 있던 시인은 단골 식당에서 밥부터 먹자고 했다. 식당인지, 그냥 집인지 얼핏 구분이 안 가는 수수하고 정겨운 식당이었다. 주인이 직접 담근 막걸리와 배추전이 먼저 나왔다. “배추전은 이렇게 밀가루 물을 얇게 묻혀 지져내는 음식”이라는 설명을 들으며 한 입 먹었다. 시원하고 아삭한 식감에 달큰한 맛이 입안을 가득 채운다. 그러는 사이 주인은 국수 반죽을 밀었다. 주문이 오면 그때부터 민다는데, 잠깐 사이에 길쭉한 홍두깨에 얇은 반죽이 몇 겹으로 둘둘 말려있다. 그릇에 담겨 나온 국수를 보니 반죽을 얼마나 얇게 밀었는지, 또 얼마나 가늘게 썰었는지 눈으로 보인다. “이게 안동국수지. 숟가락으로 떠먹을 정도의 이 국수는 어른들을 위한 경로음식이에요.” 시인의 설명이 뒤따랐다. 그만큼 정성이 들어가는 음식이다. 젊은 사람들의 안동국수는 조금 덜 얇은데, 그렇게 3단계의 두께가 있단다. 씹을 것도 없이 후루룩 넘어가는 뜨거운 안동국수를 먹었다. 안동에 왔다는 실감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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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아 있는 날들은 모두가 내일- 안상학 지음 / 걷는사람 |
안상학 시인은 1962년 안동에서 태어났다. 198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1987年 11月의 新川’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그대 무사한가’ ‘안동소주’ ‘오래된 엽서’ ‘아배 생각’ ‘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 ‘남아있는 날들은 모두가 내일’, 동시집 ‘지구를 운전하는 엄마’ 등을 냈다. 고산문학대상, 권정생창작기금, 동시마중 작품상 등을 수상했다. 시집 ‘안동소주’를 내면서 그에게는 ‘안동소주 시인’ ‘안동촌놈’이라는 정감 넘치는 별칭이 붙었다.
“형님이 집집마다 방문하면서 책을 파는 일을 했는데, 그 덕분에 우리 집에는 책이 많았어요. 서점이나 도서관이 없던 시절이었는데, 저를 위해 책을 가져온 건지 실적 때문에 떠맡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세계문학명작전집, 아동문학전집, 시집을 읽었어요. 형님 덕분에 문학 수업을 한 셈이죠.” 그러다가 중3 때 시를 제대로 만났다. “형님이 얻어온 시화 패널이 방에 걸렸어요. 안동여고 2학년 학생의 시였습니다. 어느 날 그 시가 가슴을 치는 겁니다. 아무도 찾지 않는 들판에 혼자 핀 들국화가 비바람을 이겨내고 먼 훗날을 기다리는 내용이었는데, 내 마음과 똑같아서 큰 감동을 받았죠. 나도 내 마음을 쓰고 싶었습니다. 비슷하게 써보기도 하면서,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시를 썼지요.” 안상학 시인의 가슴에 시의 씨앗을 심은 것이 한 여학생의 시였다니! 그에게 이 이야기는 처음 들었다. 어쩌면 안상학 시인의 시도 지금 누군가의 가슴에 시의 씨앗을 심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픔을 기억하는 시인
‘남아 있는 날들은 모두가 내일’에는 안동 말고도 제주, 그리고 몽골의 고비사막이 있다. 시인이 많이 아팠을 때, 아프고 난 뒤에 쓴 시들도 있다. “제주는 수차례 다녀오면서, 메모를 많이 해뒀었죠. 몽골에 대한 시는 한몽작가 교류로 몽골에 갔을 때 느낀 것들입니다. 건강이 안 좋아 이러다 정말 큰일 나겠구나 싶었는데 그 경험 후에 쓴 시도 있고요.” 몸과 마음이 아플 때 쓴 시, 그 아픔으로 세상과 사람의 아픔을 바라본 시가 담긴 시집이었으니 그렇게 슬프게 다가왔던 것 같다.
‘생명선에 서서’ 라는 시는 “이쯤일까/ 생명선 어디 이순의 언저리에 나를 세워본다”로 시작한다. 몸이 아픈 한 사람이 손바닥의 생명선을 보면서 지나온 삶을 천천히 되돌아보는 장면이 떠오른다. 현재에서 과거로 난 길을 더듬어가는 구절을 읽는 동안, 시인의 마음에 각인된 시간과 사람들을 만난다. 마음속으로 시인을 흉내 내어 보았다. 과거로 난 길을 조금 걸었을 뿐인데 마음에 슬픔이 차오른다. 왜 슬프고 아픈 기억만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그게 삶이라는 생각도 든다.
시 ‘고비’는 첫 구절에서 몽골에 다녀온 적이 있는 필자의 기억을 두드렸다. “문명 밖으로 밀어냈다고 생각한 고비로부터 오히려 내 삶이 밀려난 것은 아닐까. 하늘보다 땅이 더 넓다는 생각을 처음 해 봤다는 어느 소설가의 과장된 표현은 사실에 가깝다. (중략) 하늘이 땅을 감싸고 있는 듯도 하고 땅이 하늘을 품은 듯도 한 여기에서는 몸과 마음의 거리가 없다. 지울 경계도 없다. 스스로 그러하게 생겨 먹은 것들과, 될 수 있으면 어떻게 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 아스라이 살아가고 아스라이 죽어간다.” 지표면 위에 단 하나의 랜드마크도 없었던 땅, 끝없이 광활한 평면 위에서 동서남북을 헤아릴 수 없었던 땅이 떠오른다. 시작과 마지막이 있다면 이곳이 아닐까 싶어 눈물이 났던 곳이다. 그 마음을 이 시에서 새삼 느껴본다.
제주 4·3을 담은 시편에서는 그 비극이 남긴 상처가 아직도 생생함을 느낀다. 역사의 기록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남아있다. 그 아픔과 슬픔의 기억이 우리를 힘들게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믿는다. 어쩌면 우리를 계속 살아가게 하는 또 다른 힘이 될지도 모른다. 아파 본 사람이 또 다른 아픔을 이해할 테니까 말이다.
부산에 돌아와서 “사진을 보고 싶다”는 시인의 문자를 받았다. 사진을 보낸 후 마음에 드는 사진이 있다며 “백발이 성성하지만 서동”이라는 답이 왔다. 그렇다. 세월이 흘러 흰머리가 늘어났지만, 안상학은 여전히 시를 쓰는 ‘서동’이다. 아픔을 기억하는 시인이 있다는 것이 고맙다.
박현주 책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