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연, 삼국 이전 고대사 재구성
- 고조선서 요동 지역 거쳐
- 드넓은 동쪽 발해·말갈부터
- 이서국·오가야까지 연결
- 북방 대륙서 한반도 해양으로
- 점진적 지리적 이동을 입증
- ‘마한=백제’ 대세 의견과 달리
- 견훤·최치원 발언 인용해
- 마한 고구려 땅이라는 논증도
‘삼국유사’의 ‘기이’편에서 앞의 17개 조목은 한국 고대사에 관한 주요한 정보를 담고 있으나, 그저 이것저것 나열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지리적 관점’에서 보면 뜻밖의 계통이 드러난다. 이는 크게 두 가지 흐름으로 정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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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탕산시의 유릉(裕陵) 곧 청 건륭제의 능. 만주족 황제의 무덤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은 매우 상징적이다. |
[1]고조선, 위만조선, 마한, 이부, 칠십팔국, 낙랑국, 북대방, 남대방, 말갈발해, 이서국, 오가야
[2] 북부여, 동부여, 고구려, 변한백제, 진한, 우사절유택(신라)
‘고조선’이 시대적으로 가장 앞서지만, ‘위만조선’ 이후는 시대적 순서가 아니다. 시대 순서라면 ‘위만조선’ 다음에 ‘북부여’가 배치돼야 마땅한데, 둘 사이에 ‘마한’과 ‘이부’ 등이 길게 놓여 있기 때문이다. ‘지리적 관점’에서 보아야 위의 순서가 수긍된다. 전체적으로 북방에서 남방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오가야’와 ‘북부여’ 사이에서 둘로 나눈 것도 그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먼저 ‘고조선’에서 ‘오가야’까지 흐름을 살핀다.
■고조선에서 마한으로
‘고조선’은 “단군왕검이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고 조선을 열었다”는 ‘위서’의 기사로 시작되고, “고구려는 본래 고죽국(孤竹國)이다. 주나라에서 기자(箕子)를 봉해 조선이라 했다. 한나라 때 이를 나누어 3군을 두었으니, 현도·낙랑·대방이라 했다”는 ‘구당서’ 기사로 끝난다. 이를 ‘위만조선’에서 “처음 연나라 때부터 일찌감치 진번과 조선을 침략해서 얻고 … 진나라가 연나라를 멸망시키고 요동의 바깥 변방에 딸리게 했다”는 기사로 이어 받은 뒤, “마침내 조선을 평정해 진번·임둔·낙랑·현도 등 네 군으로 만들었다”는 기사로 마무리했다. 고조선과 위만조선, 한사군(漢四郡), 고구려 등이 거의 동일한 지역을 차지했음을 알려준다.
‘위만조선’ 뒤에 나오는 ‘마한’의 첫 기사는 이렇다. “‘삼국지’ ‘위지’에 나온다. ‘위만이 조선을 치자 조선의 왕 준은 궁중 사람들과 측근 신하들을 이끌고 바다를 건넜고, 남쪽으로 한(韓) 땅에 이르러 나라를 열고서 마한이라 했다.” 고조선의 왕이 신하들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넌 사실을 알려주는데, 다다른 곳이 ’마한’이라 했다. 이 마한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위의 기사에 담긴 지리적 의미는 사뭇 달라진다.
대체로 마한을 백제로 여기는데, 그렇게 되면 조선왕은 훗날의 백제 땅으로 내려온 셈이 된다. 마한을 백제로 본다면, ‘마한’ 뒤에 조선의 옛 땅과 관련된 ‘이부’ ‘낙랑국’ ‘북대방’ 등이 놓이는 것은 부적절해지고, 곧바로 경북 지역에 해당하는 ‘이서국’ ‘오가야’로 이어져야 마땅하다. 그런데, 일연은 ‘마한’에 다음 기사를 서술해 다른 관점을 제공한다.
“① 견훤이 태조에게 올린 글에서는 이렇게 나온다. ‘옛날 마한이 먼저 일어나고 혁거세가 우쩍 일어나자, 이에 백제가 금마산에서 나라를 열었다.’ ② 최치원이 말했다. ‘마한은 고구려고, 진한은 신라다.’【‘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신라가 먼저 갑자년(기원전 57년)에 일어나고 고구려는 그 뒤 갑신년(기원전 37년)에 일어났다고 하는데, 이는 조선왕 준을 두고 한 말일 뿐이다. 동명왕이 일어난 것은 이미 마한을 아우른 뒤였음을 이로써 알 수 있다. 그래서 고구려를 마한이라 일컬은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더러 금마산을 가지고 마한이 백제가 되었다고 하는데, 대체로 잘못된 것이다. 고구려 땅에는 본디 마읍산이 있었으므로 이름을 마한이라 한 것이다.】”
견훤이 고려 태조에게 올린 글과 최치원의 발언을 인용해 ‘마한’ 땅이 ‘고구려’ 땅임을 적시했다. 특히 일연 스스로 길게 주석을 달아 논증하며 “고구려 땅에는 본디 마읍산이 있었으므로 이름을 마한이라 했다”고 견해를 분명하게 밝히기도 했다. 이는 ‘마한’이 남쪽의 백제와는 관련이 없고 북방의 고구려가 되는 셈이니, 바로 뒤에 ‘이부’ ‘낙랑국’ ‘북대방’ 등이 이어져도 전혀 혼란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부를 거쳐 발해와 말갈로
‘마한’ 다음의 ‘이부’는 “소제(昭帝) 시원(始元) 5년 기해년(기원전 82)에 두 외부(外府)를 두었다”는 ‘한서’의 기사를 실으면서 한사군을 관장하던 ‘평주도독부(平州都督府)와 동부도위부(東部都尉府)’를 거론했다. ‘이부’ 다음의 ‘칠십팔국’에서는 “조선의 유민들이 나뉘어 70여 국이 되었으니, 모두 땅이 사방 백 리다”라는 ‘통전’의 기사와 “서한(西漢)은 조선의 옛 땅에 처음에는 4 군을 두었고, 나중에는 2 부를 두었다. 법령이 점점 번잡해지면서 갈라져 일흔여덟 나라가 되었으니, 각 나라는 1만 호였다”라는 ‘후한서’ 기사를 나란히 실었다.
‘이부’와 ‘칠십팔국’ 모두 짤막한 기사로 이뤄졌으나, 내용은 예사롭지 않다. 모두 한사군이 고조선 땅에 위치해 있음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사군을 한반도 안에 설정하는 것과 다르다. 논란이 될 만한 기사임을 일연도 의식했는지 이어지는 ‘낙랑국’을 이렇게 시작한다. “전한 때 처음으로 낙랑군을 두었다. 응소(?∼204)는 이를 ‘고조선국이다’고 했다. ‘구당서’의 주석에서는 ‘평양성은 옛날 한나라의 낙랑군이다’고 했다.” 낙랑군이 고조선 땅에 있었음을 거듭 확인할 수 있다. 지금 중국 허베이성(河北省) 탕산시(唐山市) 일대로 추측된다.
‘낙랑국’ 다음에는 ‘북대방’과 ‘남대방’이 이어지는데, ‘남대방’은 “조조의 위나라 때 처음으로 남대방군을 두었다. 그래서 대방의 남쪽으로 바다 천 리를 한해(瀚海)라 했다”는 기사를 싣고 있다. 대체로 ‘한해’를 일본의 쓰시마(對馬島)와 키타큐슈(北九州) 사이 바다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데, 잘못이다. 분명히 남대방은 지리적으로 요서(遼西) 지역인데, 한해를 쓰시마 주변으로 간주하는 것은 기사 내용과 괴리된다. ‘발해(渤海)’로 이해해야 마땅하다. 이어지는 ‘말갈발해’와 아울러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지금 탕산시 동쪽인 진황타오시(秦皇島市)나 랴오닝성의 다롄시(大連市) 북쪽 일대가 대방임을 짐작할 수 있다.
‘남대방’에서는 ‘말갈발해’로 이어진다. ‘말갈발해’에서 일연은 여러 문헌에서 지리적 사실을 인용하며 발해가 속말말갈이며 고구려를 이었다는 것, 발해의 땅이 신라 땅에까지 이어져 있었으며 말갈이 신라 북쪽 경계를 드나들었다는 것 등을 서술했다. 그리고 말미에서 동명왕에게 멸망당한 북옥저, 신라에 말을 바친 동옥저 등의 일을 서술해 북방과 남방이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대륙에서 해양으로
고조선에서 요동 지역을 거쳐 드넓은 발해 지역과 말갈이 활동했던 동쪽으로 이어져 온 흐름은 ‘이서국’과 ‘오가야’에서 일단락된다. 이서국은 신라의 서쪽에 잇닿아 있고, ‘오가야’는 이서국보다 서쪽에 있다. 오가야는 특히 경북 상주(尙州) 지역의 고녕가야(古寧伽耶)에서 고령(高靈)의 대가야, 함안의 아라가야를 거쳐 고성(固城)의 소가야까지 북쪽에서 남쪽 해안으로 이어져 있다. 이렇게 ‘고조선’에서 ‘오가야’까지는 북방 대륙의 고조선에서 한반도 남쪽 오가야까지 지리적으로 이어져 있다. 이는 한국의 고대사가 대륙에서 해양으로 지리적 이동을 하면서 전개되었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또 다른 흐름이 있다.
정천구 고전학자
※공동기획
·㈜상지엔지니어링 건축사사무소 ·국제신문 인문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