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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주의 그곳에서 만난 책 <94> 조화진 소설가의 소설집 ‘캐리어 끌기’

“나 사실은…” 친구가 사랑·실연 고백하듯 여성 7인 속내 끄집어내다

  • 박현주 책칼럼니스트
  •  |   입력 : 2020-11-15 19:39:48
  •  |   본지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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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자 책 읽고 습작하던 문학소녀
- 40대 중반에 신춘문예 당선
- 엄마 응원하는 딸 든든한 지원군

- 소설집에 이어 장편 준비중
- 인생 관통하는 깨달음 반영해
- 다양한 여성의 삶 내밀히 관찰

결혼하고, 아이 낳아 키우고, 이런 저런 일들을 겪으며 살아가는 지인들의 하소연을 들을 때가 있다. 허무하다, 답답하다, 다 내려놓고 훌쩍 떠나버리고 싶다, 그런 이야기들이다. 이야기한다고 해서 뾰족한 해결방안이 나올 리가 없다. 그저 가만히 듣기만 했는데, 그들은 하소연의 마무리를 이렇게 한다. “이야기 하고 나니 그래도 조금 후련하다.” 오히려 이야기를 들은 필자의 마음은 그때부터 복잡해진다. 여성의 삶은 세상이 아무리 흘러도 속 시원한 것 없구나 싶어 속상하다. 조화진 작가의 소설집 ‘캐리어 끌기’를 읽으면서 같은 마음이 든다. 혼자서 끙끙 앓고 있다가 작정이라도 한 듯 그동안의 사연을 쏟아내는 친구들을 만난 기분이다. 조금은 슬픈 표정으로 늘 그 자리에 서 있는 여성들, 하지만 아무도 주목해서 보지 않았던 그들의 실제적인 삶을 묘사한 소설집이다. 조화진 작가를 김해 장유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조화진 소설가가 평소 즐겨찾는 김해 장유의 한 카페에 앉아 자신의 작품세계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소설 읽으며 소설과 인생을 배웠다

조화진 작가는 창원에서 살고 있다. 터미널에서 만난 그는 곧바로 김해 장유로 길을 잡았다. “거의 매일 출근하다시피 가서 글을 쓰는 카페가 있어요. 집에서 가까워서 오전에는 늘 그곳에서 글을 쓴답니다.” 말하자면 그의 숨은 집필실인 셈이다. 도착한 카페는 장유면 대청리 상점마을의 가장 위쪽에 있었다.

카페가 있는 고개 이름이 상점령(上店領). 김해와 창원으로 오가는 산길의 가장 높은 고개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차에서 내리자 불모산 팔판산 굴암산 능선과 용지봉 아래 대청계곡 등, 가을 산자락이 눈앞으로 다가선다. 카페 맞은편에는 옛날에 상점마을 주민들이 당고개에 쌓아올렸던 돌탑도 재현돼 세워져있고, 오가는 사람들이 쉬었다 가라고 작은 정자도 있다. 숨차게 상점령을 오르내리던 사람들이 하나둘 돌을 쌓듯, 조화진도 이 자리에서 글 한 줄, 소설 한 편을 차곡차곡 쌓아올리고 있다.

캐리어 끌기- 조화진 지음/ 산지니
카페 2층의 자리, 조화진이 늘 앉는다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산이 잘 보이죠? 산세가 아름답죠? 요즘은 단풍든 가을산을 기다리고 있어요. 나뭇잎이 흔들리는 걸 보니까 바람이 불고 있나 봐요. 여기 앉아서 글도 쓰지만, 계절마다 달라지는 산과 나무를 보는 게 좋아요.” 창밖을 내다보는 눈길이 부드럽고 따뜻했다. 그의 숨은 집필실이 부러웠다.

조화진은 부산에서 태어나 자랐고, 결혼을 하면서 1985년부터 창원에서 살고 있다. “딱히 문학수업을 했다고 할 수가 없어요. 책을 좋아했죠. 이야기를 좋아해요. 잡지를 읽을 때도 서사구조가 있는 페이지를 찾아 읽어요. 혼자 책 읽고, 소설을 읽으면서 소설을 배우고 인생을 배웠습니다.” 그는 엉겁결에 신춘문예에 당선됐다고 고백했다. 책을 손에서 놓지 않고 살던 그는 40대 중반에 경남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됐다. “처음 쓴 소설이 신춘문예에 당선됐어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소설을 쓴 셈이지요.”

그의 딸이 어머니의 소설 ‘캐리어 끌기’를 소개하면서 블로그에 올린 글을 잠깐 보자, 이렇게 시작한다.

“2002년 어느 겨울날, 중학생이던 나는 얼떨결에 엄마의 신춘문예 당선 소식을 듣는다. 평소에 책을 늘 보고 수첩에 끄적이기를 좋아하는 엄마인 건 알았지만 소설가 등단을 준비한 줄은 몰랐다.” 필자가 이 글을 쓰는 것이 조금 긴장될 정도로, 딸이 소설가 어머니를 인터뷰해서 올린 블로그 내용은 자세하고 또 알뜰했다.

소설을 쓰고 싶다는 20대의 꿈을 가슴에 묻은 채 살아온 조화진은 지금 마음껏 글을 쓰고 있다. ‘조용한 밤’ ‘풍선을 불어봐’ ‘캐리어 끌기’를 냈다. 사랑, 인생, 여행을 담은 작품과 장편소설을 책으로 낼 준비도 하고 있다.

■여성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소설집

소설집 ‘캐리어 끌기’는 일곱 명 여인의 가슴속에 담긴 각각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귀환’ ‘캐리어 끌기’ ‘흐트러진 침대’ ‘휴게소에서의 오후’ ‘그 모텔’ ‘휴가’ ‘송정에서’ 등 일곱 편이다. 소설 속에는 주변과 쉽게 어울리지 못하고 겉도는 여성, 실연당하거나 사랑의 실수를 저지르는 여성, 서로 애증을 가지고 자꾸만 어긋나는 모녀 관계, 까닭모를 삶의 불안에 사로잡힌 여성들이 있다. 어딘가에서 그렇게 살고 있을 여성의 삶이 소설집 전체에 흐르고 있다. 어떤 일이 닥쳐오든 헤쳐 나가는 강인한 심성을 가진 사람도 있고, 갈피를 잡지 못한 채 흔들리고 스스로를 괴롭히는 약한 사람도 있다. 조화진 작가는 약한 여성의 이야기에 주목한다.

소설집 말미의 ‘작가의 말’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누군가는 이렇게, 또 누군가는 저렇게 살아간다. 삶의 모습은 같은 얼굴 없듯이 사람 숫자만큼 제각각 다르며 고유하다. 어떻게 보면 사는 건 신선하지 않고 획기적이지도 않다. 그러기가 쉽지 않다. 사랑, 실연, 결혼, 상실, 이별 같은 인생의 거의 모든 이런 것들은 진행될 때는 잘 모르며 인생을 통과할 땐 잘 안 보인다. 시간이 지나서야 아, 그렇구나, 그런 거였구나 하며 알게 되는 것들이 왜 늦게 깨달아지는 걸까? 나는 그런 것들의 실마리를 잡아가는 것들을 이 소설집에 넣으려고 했다.”

그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때 어떤 부분이 마음에 들어오면 빨리 소설로 쓰고 싶어 초조해진다고 했다. 그래서였던가. 조화진의 소설을 읽는 동안 친구를 만나 내밀한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 들었다. “나, 사실은…” 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는 시간, 아프고 힘들지만 그래도 어쨌든 살아가고 여성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시간이다.

소설집 속 한 편은 친구의 이야기에서 단초를 얻었다는 그는,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 때마다 이야기 안에서 여성의 삶을 놓치지 않는 것 같았다. 필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도 그의 눈이 반짝 하는 순간이 있었다. “그 이야기를 소설로 써도 될까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이런, 취재하러 왔는데 되려 관찰당하고 있었구나’ 싶어 정신이 번쩍 들었다.

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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